마지막 표범 포효하던 첩첩산중… ‘비행기 일출’ 로 유명한 합천 오도산의 황홀한 아침

입력 2014-02-27 01:37


개밥바라기별을 좌표 삼아 캄캄한 산길로 접어들 때는 몰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한지를…. 달빛과 별빛이 초롱초롱할 때는 몰랐다. 블랙홀처럼 모든 빛을 차단해버린 나무터널의 암흑이 얼마나 고독한 지를….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뒤 여명이 밝아오고서야 알았다. 눈에 보이는 사방이 모두 첩첩산중이라는 사실을….

경남 합천 읍내에서 서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유난히 우뚝 솟은 봉우리가 눈길을 끈다. ‘하늘의 촛불’이라는 뜻의 천촉산(天燭山), 까마귀 머리처럼 산꼭대기가 검다고 해서 오두산(烏頭山)으로도 불렸던 오도산(吾道山)이다. 가야산처럼 높지도 않고 황매산처럼 수려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호령하듯 뭇 산들을 거느린 오도산은 52년 전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야생 표범이 생포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표범은 열대지방의 표범에 비해 훨씬 덩치가 크고 털이 많았다. 넓은 이마와 조금 작아 보이는 귀, 두꺼운 입술에 은빛 수염을 갖고 있었으며, 앞발은 크고 다부졌다.’ (엔도 키미오의 ‘한국의 마지막 표범’ 중에서)

일본인 작가 엔도는 지난 1월 발간된 ‘한국의 마지막 표범’에서 한국 표범은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신비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1962년 2월 12일 오도산 자락의 가야마을 주민 황홍갑씨와 마을 사람들은 올무에 걸린 표범을 생포했다. 드럼통으로 만든 우리에서 사육되던 표범은 결국 서울 창경원으로 옮겨져 12년을 더 살았다.

표범이 잡힌 오도산은 서쪽으로 숙성산, 백운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준령이 성벽처럼 이어진다. 북쪽으로는 가야산, 남쪽으로는 황매산에 둘러싸인 오도산은 산세가 깊어 호랑이와 표범이 출몰하는 등 호환(虎患)이 잦았다. 1960년대 초까지 오도산 고개를 넘을 때는 30명 이상이 모여야 이동한 것도 호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표범이 사라진 날로부터 20년 후인 1982년, 오도산에 도로가 생겼다. 한국통신이 오도산 정상에 중계소를 세우면서 가야마을 입구에서 정상까지 약 10㎞ 길이의 길을 낸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오도산 정상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도로가 생기면서 사진작가들이 하나 둘 오도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도산 정상에서 ‘비행기 일출’이라는 장관을 발견했다.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거침없이 펼쳐진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오도산 정상 중계소 아래에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동쪽을 바라보는 첫 번째 전망대는 일출을 감상하는 곳으로 전망대 아래에는 새천년 일출행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두 번째 전망대는 합천호를 둘러싼 산세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중중첩첩 이어지는 산줄기가 수묵화를 그린다.

중계소 입구에 위치한 세 번째 전망대는 오도산의 낮은 봉우리 뒤로 황매산을 비롯해 운해를 뚫고 불쑥 불쑥 솟은 산들이 다도해처럼 보이는 곳이다. 발아래로 오도산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도로가 등고선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고, 응달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도로는 흑백의 선을 연결시켜 놓은 듯 생경하다.

오도산 정상에는 전망대는 아니지만 덕유산에서 남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중계소 안의 주차장 겸 마당이다. 이곳에서 보는 해질녘 일몰은 장엄하다.

오도산 일출은 시시각각 변하는 한 편의 드라마이다. 먼동이 밝아오자 하늘과 산을 구분하는 구름 띠가 서서히 주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주홍색 구름 띠 아래 골짜기마다 가로등을 밝힌 산골 마을들은 마치 표범이 웅크린 채 곤한 잠을 자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전망대는 해가 솟기 직전에 푸른색과 주홍색 물감으로 채색된 산봉우리들을 감상하는 공간이다. 푸른 윤곽을 드러내며 깨어난 여덟 개의 산줄기가 바로 앞에서 겹쳐 보이는 풍경은 웬만한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

드디어 구름을 뚫고 동녘 하늘에 해가 솟았다. 하늘과 맞닿은 남쪽 산 주변의 운무가 주홍색으로 물들고 운무를 뚫고 솟은 산도 불게 물든다. 시선을 남쪽으로 돌리면 해발 400∼600m 높이의 산 수십 개가 운무를 뚫고 불쑥 불쑥 솟아 선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에는 막 잠에서 깨어난 마을과 다랑논들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멀리 손바닥만한 합천호는 아침 햇살에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오도산 정상에서의 으뜸 풍경은 일교차가 큰 날에 봉우리마다 구름이 켜켜이 둘러싸고 골짜기마다 운무가 깔려있는 장면이다. 어떤 날에는 운무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산을 넘는 풍경도 연출된다. 신라 말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이 오도산에 반해 7일 동안이나 정상에서 꼬박 움직이지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이유다.

표범이 뛰어놀던 오도산의 속살은 하산할 때 만날 수 있다. 정상에서는 섬처럼 보이던 산들도 고도가 낮아지면서 비슷비슷한 키의 산으로 겹쳐 보인다. 피톤치드 상큼한 솔숲과 호젓한 산길,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고 있는 가야마을 촌로들의 모습에서 마지막 표범이 포효하던 그 날을 상상해본다.

합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