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홍렬 (9) 다툼 있던 교회로 첫 부임… 신혼의 꿈은 주님 몫으로

입력 2014-02-27 01:39


1982년 4월 서울 대조동루터교회에서 전도사 실습을 하던 때 만난 아내와 결혼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실습을 하면서 한동안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서울 중앙루터교회에서 전도사 실습을 할 때 담임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셨다. “오늘 저녁부터 이홍렬 전도사는 총회 결정에 따라 남부루터교회의 담임전도사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한마디 귀띔도 없이 이런 중요한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아찔했다. 단독 목회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발령을 받다니…. 뭐라고 항의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 황량한 아골 골짜기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발령을 받은 날, 곧장 저녁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울 동작구 등용로에 있는 남부루터교회를 찾아갔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싸늘했다. 교회 제직들과 목회자 사이에 깊은 갈등이 생겨 전임자가 목회지를 옮기게 됐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4개월 된 신학원생 신분으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교회였다. 교회는 한마디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담임목회자를 내쫓다시피 해서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청년들은 그를 옹호했다. 회의 때마다 고성이 오갔다. 예배 시간은 썰렁했고 주일예배 때마다 교인 수는 줄어들었다. 한 분뿐인 권사님은 “이꼴 저꼴 보기 싫다”면서 한숨을 쉬셨다.

교인들이 나를 담임목회자로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어르신 성도들은 “마땅치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초짜 목회자를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교단 총회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던 필자는 “하나님께서 척박한 환경에서 단련시키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다”며 정말 열심히 사역했다. 연세대 신학대학원과 루터신학원에서 공부하며 심방을 다니고 설교를 준비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별 소득은 없었다. 설상가상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경기도 가평으로 수련회를 갔다가 경찰 조사를 받는 일도 벌어졌다. 한밤중에 개울가에서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다 그 지역 주민들과 다툼이 벌어졌다고 했다.

교회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풍요로울 수는 없었다. 교회에 빚도 많았다. 부임 전 교회에서 온풍기를 할부로 들여놨는데 한 달 치만 할부금을 납부한 상황이었다. 교회 승합차도 갚아야 할 할부금이 산더미 같았고 총회에서 진 빚도 고스란히 후임 목회자의 몫이었다.

사례비로 받은 20만원은 난방비 등 교회 운영비로 쓰면 남는 게 없었다. 감사하게도 당시 재정을 맡은 곽일남 집사님을 비롯해 여러 성도들께서 도움을 주셨다.

나는 어떻게든 교회를 회복시키겠다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서울 용산의 미군부대에 들어가 한국인 군인들을 위해 베델성서연구 교재를 놓고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당시 부대 측으로부터 한 달에 120달러의 수고비를 받아 교회 재정으로 충당했다. 교인들에게는 교단법에 의해 받게 돼 있는 퇴직금도 사양하겠다고 선언했다.

목회자야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은커녕 팍팍한 생활에 시달리던 아내의 까맣게 타들어가던 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살림을 꾸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느 날 아내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조용히 불렀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