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공초 묘소에서 만난 봄

입력 2014-02-27 01:33


지난 주말 서울 도봉구 북한산 둘레길로 산행을 갔다가 수유리 빨래골에 있는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 묘소에 들렀다. 백 평쯤 되는 묘역엔 시인의 유택답게 운치 있는 묘비가 서 있었고 주위의 잡목들은 아직 스산하기는 했지만 봄은 묘지에 먼저 온다는 듯 앙상한 진달래 가지 끝엔 참새 부리만한 새 잎이 달려 있었다.

묘비는 화가 박고석이 고인의 무욕 청정한 삶에 어울려야 한다며 제안한 정사각형의 육중한 화강암에 서예가 김응현의 힘찬 한글 예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묘비 뒷면에 새겨진 글은 짧고도 명료했다. “廢墟誌(폐허지) 동인으로 신문학운동에 선구가 되다. 평생을 독신으로 표랑하며 살다.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 유시집(遺詩集) 한 권이 남다.”

단 네 개의 문장으로 요약된 공초의 문학 활동은 1920년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함께 ‘폐허’ 동인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공초는 ‘폐허’ 창간호에 실린 수필 ‘시대고와 그 희생’에서 자신의 ‘폐허의식’이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결부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은 황폐한 폐허이며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다”로 시작되는 ‘시대고와 그 희생’은 그러나 청년들에게 이렇게 고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우리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희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희생은 본래 비극이니까. 그러나 영원한 내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은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부활이다.”(‘시대고와 그 희생’)

그는 40여 년의 시작(詩作) 활동 끝에 겨우 38편의 시가 수록된 유고시집 ‘공초 오상순 시집’(1963) 한 권 남겼을 뿐이다. 그것도 후배 시인들이 그의 사후에 묶은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영결식은 당시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되었는데 영구행렬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교복을 입은 수십 명의 청초한 여학생들이 오색 만기(輓旗)를 들었고 공초의 초상화를 앞세운 영구차 뒤로 많은 문인들이 뒤따랐다. 공초의 묘소는 구상(1919∼2004) 시인이 1963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청하여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6·25전쟁 당시 피란지 대구에 육군 지휘부가 집결해 있을 때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 주간이자 종군작가단을 이끌던 구상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던 박정희와 자주 어울렸고 구상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를 관(官)에 나가 있다는 이유로 박첨지라고 호칭했을 뿐 한번도 각하라고 부르지 않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구상이 존경하는 시인이 바로 오상순이었다. 혹자는 공초가 눈을 감았을 때 구상이 박정희에게 청해 수유리 빨래골에 묏자리 백 평을 받아냈으니 손병희·김병로·신익희·조병옥 등 정치적인 거물들과 더불어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유택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공초의 복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속설의 이면을 뒤집어보면 그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초에게 베푼 시혜가 아니라 구상과의 우정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공초의 묘소에서 봄기운을 느끼는 동시에 공초의 것은 공초에게, 구상의 것은 구상에게로 단정하고 결연하게 나뉘는 지점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공초에게 백 평의 장지는 분명 사후의 지복이지만 정작 공초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그 지복은 그의 묘소에 들러 봄기운을 느끼는 만인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묘소는 지상에 남은 마지막 집 한 채가 아니라 공초와 구상과 박정희가 한데 어우러진 의미있는 설치미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속설의 이면을 뒤집다가 만난 봄기운을 나는 그날 저녁 서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까지 끌고 갔다가 보았다. 초로의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충무로역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손잡이 위에 누군가가 토해놓은 토사물을 걸레로 닦고 있었다. 과연 이런 궂은일을 묵묵히 해내는 청소부 아주머니로 인해 봄날은 오고야 만다. 나는 공초 묘소에서 만난 봄기운을 그 아주머니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