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강은교] “세상에서 가장…”

입력 2014-02-26 02:07


어느 날 TV 채널을 돌리다가 자줏빛의 아주 실한 대추와 부딪혔다. 젊은 영농후계자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는 도시의 ‘잘나가는’ 회사를 집어치우고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산골 고향 마을로 돌아와 대추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주 실한 대추를 수확하게 되어 일년 수익이 굉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자줏빛 아름다운 열매를 크게 확대해 보여주었다.

‘대추가 저렇게 예쁘다니… 보석 같잖아….’ 마지막 멘트가 더 인상적이었다. 리포터가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젊은 영농 후계자는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벌써 생각해 놓았다는 듯 거침없이 대답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대추를 생산하는 겁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멋진 멘트였다.

나는 “젊은 사람이 아주 괜찮네”라고 중얼거렸다.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와 기차를 탈 일이 생겼다. 새벽 기차를 타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코레일이 되겠습니다’라는 멘트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아∼, 그렇구나. 저런 어법이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었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이라는 어법을 쓰지.” 어느새 나의 말은 ‘세계를 세상’이라고 바꾸어 중얼거리게 하면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렇게 흔한 어법을 처음 만난 것처럼 감동하다니! 시인이라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중얼거려야 할 내가….’ 그러고 보니 사방에서 그 어법은 쓰이고 있다. 기차 옆으로 스치는 시골 마을의 한 건물 벽에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불고기’, 종착역에 내리니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미세먼지 지수 사이로 뿌옇게 드러났다. 대형 전광판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겨스케이팅’이 펼쳐지고 있었다.

밤이 되어 돌아오는 기차를 타자, 기차 창밖으로 불빛들이 반짝였다. 밤중에 비치는, 어둠 속마다 반짝이는 불빛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어느 곳은 아마도 교회인지 십자가 불빛이 보석처럼 빛나며 어둠을 뚫고 다가오기도 했다. 불빛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소리가 여기서 들려요…’라고. 종착역에 내리니, ‘갈매기 떼 나르는…’ 노랫소리가 울린다. 내가 사는 항구도시인 B도시,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길은 나에게 속살거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덕길이 될게요!’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어야 해, 너는. 내가 사는 곳이니까.’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