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기웅] 인간, 萬物의 靈長인가

입력 2014-02-26 02:07


우리의 삶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함정에 매몰돼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살펴볼 틈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는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문해 볼 겨를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말이다. 1970년대로부터 80년대, 그리고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나는 어느 부지런한 사진작가 친구와 국토여행을 하면서 이 나라 땅의 속살을 관찰하고 다녔다. 그때 느낌을 적은 글 한 토막을 옮겨 본다.

탐욕이 가축들 살처분 초래해

“…그저 소출만을 노리는 축산업자들의 얼굴엔 차라리 살기가 느껴진다. 아름답던 산천의 계곡 곳곳에 자리 잡은 축사(畜舍)를 발견하는 순간, 이를 경영하는 축산업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지독하고 탐욕스러운 장삿속에 매몰돼 있는지가 단박에 느껴졌다. 맑은 개울이 흐르던 계곡엔 축사에서 흘러나오는 배설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더러운 축사 바닥은 눈길조차 주기에 민망할 정도로 질퍽대는데, 가축들은 그 위에 하루 종일 처연한 모습으로 오물에 발을 묻거나 엎드려 오물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몸서리를 친다. 축산업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저렇게 하면서까지 생명을 학대하는가. 그리고 우린 저 가축의 고기를 탐식(貪食)하는가….”

이 한 구절 속에 오늘 우리 농업경제의 굴곡진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그때의 풍경에 비해 외형적으로는 좀 깨끗해지고 다듬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더 아프고 심각한 병리(病理)들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다.

인간이란 만물의 영장이라 배워 왔다. 당연하다 생각되는 이 말에 나는 꽤 오래전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영장’이란 지위를 준 이는 과연 누구일까. 생물학적 용어의 뜻만이 분명 아닐 터인 이 용어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신이 주었는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어깨에 붙인 계급장 아닐까.

지난 1월 발생해 지금도 진행 중인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해 살처분된 가금류는 대략 몇 마리나 될까.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 한 달 동안 멀쩡히 살아 있는 378만3000마리를 죽여 땅에 묻었단다. 돌림병 번짐을 막기 위해 이런 끔찍한 예방책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영장들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는 30년 전에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흘려보내던 불쾌한 가축우리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살처분당하는 가축과 살처분하는 인간, 두 생명 간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성(靈性)을 가진 존재 가운데 수장(首長)’이라는 뜻의 영장들이 영성을 지닌 가축들을 이처럼 잔혹하게 살처분할 수 있는가. 끝없는 탐욕을 내세워, 맹목적으로 경쟁을 부채질해대는 교육과 기술지상주의와 출세지상주의가 판을 치도록 한 인간에게 이 세상을 거느릴 자격을 누가 줄 수 있겠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들에게 조용히 외쳐 본다. “인간들이여, 너의 어깨로부터 ‘영장 계급장’을 속히 떼내어라. 그리고 선한 마음가짐으로 무릎을 꿇고 너의 ‘영성 가짐’이 어떤 경지이며, ‘영장’이란 과연 어찌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라.”

인간 절제심으로 AI 막아야

이 세상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욕망을 줄여야 한다. 적게 먹으면서도 그 먹는 방법과 말하는 뜻을 헤아려라. AI를 철새가 옮겼다고? 구제역이 어디로부터 왔다고?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보가 만들어낸 병균을 인간이 옮겨 놓고는 엉뚱하게 착한 짐승들에게 덮어씌우는 이 고약한 어리석음을 보라. 덜 벌고 덜 쓰고 덜 먹고 덜 가져라. 착하고 죄 없는 짐승들을 멋대로 번식시켜 참혹한 방법으로 기르다가 멋대로 생매장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내 심판해야 한다. AI를 원천적으로 막을 방안은, 오직 인내하는 인간의 절제심밖에 없다. 절제, 절제, 끝없는 절제를!

이기웅 열화당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