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닫은 문 열고 외부 전시회… 변화 이끄는 전영우 간송미술관장

입력 2014-02-25 01:37 수정 2014-02-25 16:53


1년에 봄과 가을, 보름씩 딱 두 번 전시를 열고 11개월은 문을 꽁꽁 닫아두던 간송미술관이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8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3월부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사상 처음으로 외부 전시를 열고, 주요 소장품을 최근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등 간송미술관의 탈바꿈이 예사롭지 않다. 홈페이지조차 없던 미술관이 아니었던가. 무엇이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오던 전영우(74) 간송미술관장을 만나 그 얘기를 들어봤다. 서울 도봉구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가옥 보수 및 공원화 사업 착공식이 열린 지난 20일. 오후 3시부터 1시간가량 진행된 행사 후 만난 전 관장은 인터뷰가 영 내키지 않은 듯했다. “재단 이사장이 나오시기 어렵다며 나에게 모든 걸 맡겼는데, 허∼참…”하며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한 번도 언론과 인터뷰한 적이 없어요. 딱 한 번 신문에 기사와 함께 사진이 실렸는데 돌아가신 후의 부음기사였어요. 별로 잘난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는데 신문에 날 일이 뭐가 있겠느냐고 하셨죠. 아버지도 그러셨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추운날씨에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다”며 근처 방학동성당 로비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간송 가옥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뜻 깊은 행사가 열린 날인만큼 부친 얘기부터 꺼냈다. “단정한 모습의 아버지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엄격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셨어요. 평생 동안 한 번도 잘못했다고 야단치시는 걸 못 봤거든요. 도자기, 그림, 글씨를 어루만지고 바라보며 늘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죠.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그렇게 집안에 스며든 것 같아요.”

미술관이 일대 변화를 꾀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출품된 2008년뿐만 아니라 지난해 전시에서도 관람객이 몇 시간씩 길게 줄을 서 있는 걸 보고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 미술품을 이렇게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시설과 환경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하지만 당장 그런 시설이 없으니 외부 전시를 기획한 거죠.”

DDP에서 9월까지 진행되는 전시의 1부는 간송이 문화재를 구입하고 소장하게 된 사연 중심으로 꾸며지고, 2부는 미술관 소장품의 진품명품을 선보이는 전시로 구성된다. 전 관장은 “1942년 당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었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금 1만1000원을 주고 샀다는 얘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 조선청화백자 등 명품의 백미를 제대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간송미술관(전신 보화각)의 전시장은 1938년 건립된 건물로 시설이 너무 낡고 좁아 열악하기 짝이 없다. 화장실도 단칸이어서 관람객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 관장은 “관람객들에게 더 이상 고생을 참아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며 “미술관 내 새로운 전시장을 짓는 계획을 빠른 시일 안에 세워 연내 설계를 거쳐 착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최고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간송미술관 정도라면 국가나 기업체 등의 지원으로 첨단 시설의 전시장 하나쯤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빚을 지는 게 되고 부담이 생겨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힘을 모으기 위해 문화재단을 설립한 거예요. 간송후원회도 만들어지고 있다니 감사하고 든든할 따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문화재를 간송이 사재를 털어 모은 소장품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전 관장은 “유물 분류 체계상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도 있고 따로 정리해야 하는 것도 있어 딱 부러지게 몇 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며 “이번 온라인 공개를 계기로 소장품 분류와 정리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향후 3년간 이어지는 DDP 외부 전시 때문에 올해 미술관의 봄 전시는 없다. 가을 전시부터 DDP와 병행해 또 다른 방식으로 기획전을 열 계획이다. 전 관장은 “DDP 전시가 다소 대중적이라면 미술관 전시는 연구·학술적인 전시가 될 것”이라며 “미술관 전시는 50년 가까이 동고동락해온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이 계속 중심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장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유물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며 “꼭 하나 꼽으라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처럼 간송이 한국미술의 진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유물을 모으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