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카레이스키 그후
입력 2014-02-25 01:36
정든 고국을 떠나 물선 외국에 정착한 해외동포 수는 얼추 700만 명을 헤아린다. 남한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적잖은 이주노동자들이 국내로 들어오듯 이들도 저마다 꿈을 좇아 말도 안 통하고 생활문화도 전혀 다른 낯선 곳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살기 퍽퍽했다.
해외이주 역사는 곧 한(恨)의 역사이다. 오로지 배고픔에서 해방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학계에선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러시아 연해주에 새 터전을 잡은 1860년대 초를 해외이주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역사적으로 경오도강(庚午渡江)으로 불리는 집단이주가 이뤄진다. 당시 함경도민 6500여명이 두만강을 건넜다. 대기근이 휩쓴 고향엔 먹을 게 없었다. 이들이 러시아 고려인, 카레이스키의 시조인 셈이다.
구한말엔 미국과 멕시코 등지로 이주지역이 확대됐다. 말이 좋아 이주이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노예생활과 다름없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노동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멕시코 선인장 농장으로 팔려간 조선인들은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를 떠올리며 힘없고 가난한 나라를 원망했을 것이다.
이민은 2000년대 이전까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현상이었다. 박정희정권은 인구정책의 하나로 1962년 해외이주법을 만들어 이민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해외이민자는 그해 386명에서 꾸준히 증가해 1976년 4만6533명으로 정점을 찍는다. 이후 증감을 거듭하다 2003년 1만명 선이, 2010년 1000명 선이 무너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302명으로 1962년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대로 역이민은 증가추세다. 해외에서 국내로 영구귀국한 역이민자는 2003년 2962명에서 2011년 4164명으로 40% 늘었다. 경제성장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된 생활여건과 노후를 고국에서 보내려는 애틋한 향수병이 역이민을 불러들이고 있다. ‘독일마을’ ‘미국마을’을 조성해 역이민자를 유치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쟁도 뜨겁다.
해외이주자는 줄고 역이민자는 늘고, 국내 거주 외국인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살기 괜찮아졌다는 하나의 지표다. “뭐가 살기 좋냐”고 볼멘소리 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그래도 태어나서 자란 곳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