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김연아, 마이클 조던, 이순신

입력 2014-02-25 01:36


23으로 본 유쾌한 상상력

김연아가 소치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피겨 인생을 통틀어 모든 대회에서 한번도 시상대를 놓친 적이 없는 피겨 사상 최초의 선수로 남았다.

그는 시니어 무대 데뷔 후 총 ‘23회’의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1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하며 불멸의 무대를 연출했다.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며 피겨 사상 최초로 4개 메이저대회를 제패했고, 두 차례의 올림픽에서 쇼트와 프리를 ‘클린’했다. 그가 도약하면 곧 역사가 됐다.

열혈 스포츠팬이라면 ‘23’이란 숫자에서 마이클 조던을 기억할 것이다. 등번호 23의 조던은 미국프로농구(NBA)의 불멸의 스타다. 그는 시카고 불스에서 뛰던 1990년대 NBA 3연패를 두 차례나 이끄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NBA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가장 다양한 공격루트를 가진 선수였다. 엄청난 체공력에 감탄한 팬들은 그에게 ‘에어 조던’이란 별명을 헌사했다.

이제 시대를 거슬러 15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로 가보자.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에게서 숫자 ‘23’을 기억해내자. 충무공은 왜와 23차례의 전투를 치러 전승을 거둔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불멸의 영웅이다.

숫자 23으로 우연히 마주친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바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김연아는 척박한 국내 빙상 여건에서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세계 정상에 섰다. 끊임없는 부상,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극복하고 선수생활 내내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천부적 재능 때문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모욕적일 만큼 연습에 매진했다.

조던은 중·고교 시절 농구를 썩 잘 못했다. 친형의 반만큼이라도 농구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형의 등번호 45번의 절반인 23번을 달고 절치부심했고, 대학에 가서야 최고가 됐다.

이순신은 자신을 박해하던 조정과 대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희망을 잃어버린 백성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가 23전 전승을 거둔 데는 치밀한 준비로 이길 조건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어 자기 분야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이들에게 색다른 유사점도 발견된다. 김연아는 절정의 순간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복귀했다는 점에서 조던을 닮았다.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우승 후 2년의 공백기간을 가진 뒤 다시 현역 복귀했다. 조던도 91∼93년 NBA 3연패를 달성한 뒤 아버지가 강도에게 살해당하자 은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2년 만에 복귀한 그는 또다시 팀을 3연패로 이끈다. 소치올림픽을 2년 앞두고 현역으로 돌아온 김연아는 두 번째 올림픽 무대에서도 한층 성숙한 기량으로 금메달 이상 가는 감동을 안겼다.

김연아의 최후는 이순신 닮아

하지만 최후의 무대가 조금은 슬펐다는 점에서는 김연아는 이순신과 흡사하다.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그는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로 그가 신명을 바치고자 했던 나라를 위해 마지막 충성을 다한다.

김연아는 은퇴 무대 마지막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리스케이팅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최고의 찬사를 받은 그였지만 돌아온 것은 은메달이었다. 그가 만약 금메달을 받았더라면 이보다 더한 찬사와 안타까움을 한 몸에 받았을까. 그는 절정의 순간 운명을 달리한 이순신처럼 최후의 2인자가 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가장 높은 곳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서완석 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