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홍렬 (7) ‘성직자의 길’ 권유받고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입력 2014-02-25 01:34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을 때 담임목사님이 조심스레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홍렬 선생한테 다른 뜻이 있으신 것 같아. 신학을 해서 성직자의 길을 가보는 건 어떨까.” 과연 부족한 내가 성직자의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이 커졌다.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했다.

38일째 새벽기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래, 그 길로 가자’라는 결심이 생겼다. 내 능력에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는데도 그런 용기가 뜨겁게 솟아올랐다.

다만 평범한 부모님들처럼 성실히 공부해서 판사나 검사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셨던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두 분 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지만 목회자가 되겠다는 아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 마음은 그러나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않고 밤낮없이 공부를 해 연세대 신과대학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적잖이 실망하시는 눈치였으나 결국 내 뜻을 존중해 주셨다. “기왕에 목회자가 되기로 한 이상 바르고 참된 주의 종이 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1975년에 대학생이 된 뒤 채 한 달도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을 때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부랴부랴 휴학을 하고 입대해 강원도 홍천의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졸병이었지만 신학생 신분임을 감안해 주일에는 모든 근무와 작업에서 열외를 시켜주었다. 제대를 1년쯤 앞뒀을 때에는 병사 신우회 회장도 됐다. 사단교회를 짓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1년치 봉급을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이 소문이 사단장에게도 알려져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할 수 있게 됐다.

검정고시를 본다고 늦어진 데다 군 복무까지 마치고 대학에 돌아오니 신입생들보다 여섯 살 정도 많은 나이가 돼 있었다. 이모 댁에서 신세를 지고 살던 대학생 때에도 생활비 문제로 고생을 했다. 버스 토큰은 한두 달치를 미리 사둬서 문제가 없었지만 점심이 문제였다.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할 염치가 없었다. 300원짜리 자장면이나 600원짜리 밥은 사치였다.

매점에서 50원짜리 단팥빵을 하나 사서 주머니에 넣고는 조금씩 아껴서 먹었다. 그때 점심시간은 왜 그리 길던지, 아무리 빵을 나눠 먹어도 시간은 지나가지 않았다. 배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도 그치지 않았다. 연세대 신과대학 건물인 한경관 지하의 화장실로 내려가서 수돗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공복감을 누그러뜨렸다.

하루는 캠퍼스 뒷동산에 올라가 빵을 먹으며 하나님께 푸념을 했다. “하나님,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켜도 밥은 먹이는데 주의 종을 만드시려면 배는 고프지 않게 해 주셔야죠”라며 하소연을 했다. 하나님은 “배고프냐? 배고파라. 그리고 배고픈 양떼의 심정을 헤아려라. 네가 진정 배고파보지 않고 어떻게 배고픈 양떼를 위해 설교하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여름방학 때에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북 경주시 안강읍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공장을 짓는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 일을 함께 했다. 허름한 막사에서 지내면서 리어카로 시멘트와 모래, 자갈 등을 한 곳에 모아놓고 콘크리트 반죽을 만들어 나르는 일이었다.

한 달 정도 일을 한 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아버지는 막사 한 구석으로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의 품삯을 모두 내게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이 아비가 못나서 막노동 고생까지 시키는구나. 아비를 용서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한때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흙 묻은 돈 봉투를 내미시는 모습에 뭉클했다. 믿음 안에서 아버지의 지난 세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