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2차 상봉] “사망신고까지 한 오빠 살아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입력 2014-02-24 01:37 수정 2014-02-24 03:45


60여년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가족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23일 오후 남북 이산가족 2차 상봉 단체상봉 행사가 열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는 회한과 설움이 찬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이산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가족의 얼굴과 손을 어루만졌다. 헤어진 세월을 원망하며 가족의 따스한 체취를 좀 더 느끼기 위해서였다.

◇“형님 대신 가겠다”며 의용군에 끌려간 동생=임금영(86)씨는 북측 동생 선영(83)씨를 보자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본인 대신 동생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 살았을 때 인민군이 두 형제 중 한 명이 의용군으로 가야 한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에 동생 선영씨가 “내가 형님 대신 가겠다”고 나섰고, 형은 남게 됐다. 금영씨는 “그때 네가 떠난 지 벌써 60여년이 지났다. 내가 21세였고, 네가 18세였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두인(80)씨는 북측에 있는 형 화인(85)씨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자 넙죽 큰절을 하고 오열했다. 동생 두인씨는 “내가 두인이야. 형님 잡혀갔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나 기억 안 나”라고 물었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한 형 화인씨는 동행한 조카들이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을 보여주자 그제야 말없이 사진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북측에 있는 큰형 이선영(84)씨를 만난 두영(79)씨도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6·25전쟁 당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갑자기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의용군에 안 가면 가족들을 몰살한다 해서 강제로 징집된 후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었다. 두영씨가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큰형을 보고 싶다고 매일 말씀하셨다”고 말하자 형 선영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죽은 줄 알았는데…살아줘서 고맙다”=남측 최고령자 이오순(94·여)씨는 북측 남동생 조원제(83)씨를 한눈에 알아봤다. 이씨는 동생의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 고맙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오열했다. 동생 조씨는 “누님, 이게 얼마 만이오. 난 누님이 안 계시는 줄 알았소”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어려서 아버지가 호적을 등록하지 않아 시집갈 때 다른 사람 밑으로 호적을 등록해 성이 바뀌었다고 동생에게 설명했다.

오빠 류근철(81)씨를 만난 정희(69)씨도 “사망신고까지 한 오빠가 살아서 우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적 같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감격해했다.

6·25전쟁 때 헤어진 동생 방상목(84)씨를 만난 누나 례선(89)씨도 “죽은 줄 알고 지내다가 느닷없이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북측 상봉자 88명 중 3분의 1 이상이 의용군=2차 상봉에선 북측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88명이 남측 가족 357명을 만났다. 특히 북측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88명 중 31명이 6·25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입대해 북으로 올라간 사연이 있었다. 의용군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불리해진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남측 주민을 대상으로 급히 만든 부대다. 낙동강 전투가 치열해지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남측의 고교생 이하 청소년들까지 의용군으로 선발했다. 자발적 참여자도 있었지만 강제로 징집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문가들은 전쟁 당시 30만명 이상의 의용군이 징집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2차 상봉에선 또 전쟁 당시 짐꾼 등으로 납북되거나 남측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북으로 간 경우도 각각 11명, 4명이나 됐다. 이연숙(79·여)씨는 간호사 일을 하다 북으로 끌려간 언니 임순(81)씨를 만났다. 언니는 전쟁 당시 시립간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인민군이 후퇴할 때 북으로 잡혀갔다. 동생 연숙씨는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7년 정무 2장관을 지낸 이력이 있다.

◇남측 기자 한때 방북 거부당해=앞서 우리 측 상봉단이 북측 출입사무소(CIQ)에서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 북측이 남측 기자의 방북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측 경제지 기자의 노트북 바탕화면에 있는 북한인권법 관련 파일이 문제가 됐고, 한 방송사 카메라 기자는 신고하지 않은 외장 하드를 소지한 것이 빌미가 됐다. 1시간20분가량 승강이 끝에 방송사 기자의 입경은 허용했다. 하지만 경제지 기자는 끝까지 거부돼 오후 4시쯤 우리 측 출입사무소로 돌아왔다가 남북이 원만한 행사 진행을 위해 협의한 끝에 방북이 허용돼 오후 10시15분쯤 다시 금강산으로 향했다.

한편 북한 매체들은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가 끝난 지난 22일 상봉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측 가족, 친척들은 남녘의 혈육들에게 김정은 원수님의 품속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데 대해 이야기했다”고 소개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