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것 마음껏”… 몰입교육으로 이탈 학생들 품어
대표적 자유학교 샌즈스쿨의 성공 스토리
열네 살 소녀 아비(가명)는 요즘 점토공예에 푹 빠져 있다. 흙에서 풍기는 특유의 질감이 좋고, 만들 때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도 좋다. 1주일째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는 백조 한 쌍은 ‘보물 1호’다. 잠들기 전 다음날 손댈 부분을 머릿속으로 그리기도 한다. 좋아하는 동물들의 형상이 조금씩 완성될 때마다 뿌듯하다. 매일 학교에 가지만 수업은 듣지 않고 있다. 아비는 2주째 미술실에 ‘흙투성이’로 앉아 있다.
아비 곁에는 미술담당 교사 스티브 호어씨가 있다. 미술대학 교수 출신인 그는 아비에게 ‘스킬’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비가 요구할 때만 살짝 노하우를 풀어낼 뿐이다. 작품의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미술실 공간을 내어 전시를 도와준다. 미술실은 그가 낡은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공간을 제자들의 작품으로 채우는 게 그의 가장 큰 낙이다.
국민일보 취재진이 지난해 11월 방문했던 영국 애슈버턴시 대안학교 ‘샌즈스쿨(Sands School)’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아비는 학교 안내를 맡았던 학생이었다. 검은색 오리털 점퍼에 무릎 부분이 늘어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슬리퍼를 끌며 밝은 표정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학교는 그의 옷처럼 허름했지만 편안했다.
허름하지만 따뜻한 학교
점심시간이 한창이었던 오후 1시30분. 자유학교라는 타이틀답게 무질서해 보일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공부방, 방송실, 음악실, 식당, 서재 등으로 꾸며진 본관은 파티장 같았다. 책이 가득 꽂힌 공부방에서는 교사와 학생 3∼4명이 모여 왁자지껄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고,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에서는 초등학생 연령대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옆 소파에서는 좀더 큰 아이가 독서를 하고 있었고, 복도와 계단에 삼삼오오 걸터앉은 아이들은 ‘시내 어디로 놀러 갈까’는 주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건물 밖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낡은 창고인 미술실부터 나무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는 목공예실, 벤치가 놓인 널찍한 안마당, 스케이트보드장, 인공암벽등반장, 나무 위에 학생들이 만들고 있는 작은 집까지 아이들과 교사들이 섞여 어울리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된 오후 2시 이후부터 소음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수업이 진행 중이었지만 마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넘어지고는 겸연쩍은 미소를 보여주는 남학생, 교실 안팎을 들락거리다 아예 학교 밖으로 외출하는 무리도 있었다.
학교가 맞지 않을 뿐 ‘문제아’는 아니었다
아비는 이런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런던 태생인 그가 이 학교를 선택하게 된 얘기도 곁들였다. 아비는 ‘학교이탈 청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영국에서 유명한 방송인, 어머니는 요리연구가로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교칙이 엄격한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비는 침울해지기 시작했다. 딱딱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교우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같은 옷 입고 똑같이 시간표대로 지내는 게 정말 싫었어요.”
집단 따돌림 징후까지 보이자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에서 공부하는 ‘홈 스쿨링’을 시작했다.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바쁜 부모들이 감당해내지 못했다. 아비는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가 돼 갔다. 잠시 일을 접은 어머니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학교가 샌즈스쿨이었다. 한 학기 정도만 다녀볼 생각이었는데 벌써 1년이 넘었다.
아비 가족에게 매주 수요일 오전 학교 구성원 전체 회의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직원 징계는 물론이고 예·결산, 교직원 인사까지 결정된다. 학생들에게 권한이 주어지니 모든 게 학생 위주다. 대입 준비를 원하는 학생을 위해 문학·수학·역사·지리·과학 등 기본 교과목 수업도 제공되지만 학생들 수요가 많은 연극·음악·스포츠 프로그램도 짜임새 있고 수준 높다. 정규 교사는 5∼7명 규모지만 학생들 요구에 따라 외부 강사들이 수시로 초빙돼 아이들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곳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은 듣지 않아도 된다. 수업 도중이라도 흥미가 없어지면 교실에서 나가도 제지하지 않는다.
마음껏 몰입하라
이 학교는 몰입을 권한다. 흥미 없는 수업에 시간낭비하지 말고 역사든 문화든 운동이든 심지어 인터넷 게임이든 하고 싶으면 하라는 식이다. 몰입의 주제는 수업 중에도, 게임 중에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학생이 ‘2차대전’이라는 주제에 흥미를 보이면 역사 교사가, 셰익스피어에 관심을 가지면 문학 교사가 몰입을 부추긴다. “이거 재밌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교사의 지원 아래 집중하게 된다.
조(가명·15)의 경우 목공예에 몰입해 있었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목공실에서 연극에 쓸 무대장치를 제작하고 있었다. 연극반이기도 한 그가 만든 무대장치는 연극 세트로 활용될 예정이다. 목공예에 소질을 보이고 있는 그는 지난해 초 친구들과 카누도 만들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카누를 직접 물에 띄워 급우들과 신나게 놀았다. 목재 절단기와 전기대패 등 각종 장비가 완비된 목공실 천장에는 카누 두 척이 ‘당당하게’ 매달려 있었다. 목공예 담당 교사인 폴 패트릭 리처드는 “몰입하고 있는 아이들에게서는 어떤 즐거운 에너지가 끊임없이 나온다”고 했다.
뒤떨어진 과목은 교사가 1대 1 과외로 보충
아비와 조는 학습 진도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면 교사가 1대 1로 뒤떨어진 과목을 보충해준다. 조는 “게으름만 피우지 않으면 친구들 노트를 빌려서라도 얼마든 보충할 수 있다”고 했다. 이 학교는 또한 나이·학년과 상관없이 6개 수준별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교사 1인당 학생수가 10명 정도라서 가능하다. 다음 학기에 자신에게 맞는 쉬운 코스를 선택하면 그만이다.
영국 학생들의 기본 학습량이 많지 않은 것도 몰입교육을 가능케 한다. 영국 중등교육 자격시험(GCSE) 수준은 높지 않다. 자신이 고른 5개 과목에서 C등급 이상만 받으면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초적인 직업을 구하는 데 별 문제 없다. 후기 중등과정으로 불리는, 우리나라 고 2∼3 수험생에 해당하는 ‘A레벨’ 과정도 3∼4개 선택과목만 통과하면 대입 자격이 주어진다.
바탕에는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라는 기본 인식이 깔려 있다. 학창시절 모든 공부를 몰아서 시키지 않는 분위기다. 최근 ‘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공부 기계로 만들 것인가’라는 반론에 수그러졌다고 현지 교육 전문가들이 귀띔했다.
◇Key Word : 샌즈스쿨(Sands School)
1987년 개교한 영국의 대표적 자유학교. 런던 남서부에서 3∼4시간 떨어진 소도시인 데번카운티 애슈버턴에 있다. 당시 인근 대안학교 한 곳이 문을 닫게 되자 이를 아쉬워한 교사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 이후 학생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미숙한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철학을 27년 동안 지켜 왔다. 초기에는 전교생 40명 규모였지만 2014년 현재 70여명으로 불어났다. 전 세계 대안학교의 시초이자 교육학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서머힐 스쿨(Summerhill school)’과 함께 영미지역에서 성공적인 자유학교로 명성이 높다.
애슈버턴(영국)=글·사진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특별취재팀=이영미 정승훈 차장, 이도경 김수현 정부경 황인호 기자
[착한 사회를 위하여-학교 떠난 아이들을 품자] (8) 해외 대안학교-영국편
입력 2014-02-24 01:39 수정 2014-02-24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