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기쁨-Helper’s High] “나눔의 맛, 빵맛보다 더 고소해요”
입력 2014-02-24 01:38
굿네이버스 후원하는 ‘고재영빵집’ 주인 고재영씨
고재영빵집을 찾아가기 위해 지난 12일 오후 수도권 전철 4호선 산본역에 내려 출구로 나가는 길에는 바게트 빵이나 도넛을 파는 프랜차이즈 가게가 즐비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제과점의 진열장이다. 빵집의 전쟁터가 있다면 여기가 최전선인 듯했다. 고재영빵집은 여기서 7년이 넘게 성업 중인 동네 빵집으로 유명하다.
아파트를 지나 조금 한적하고 허름해 보이는 상가 1층에서 고재영빵집의 간판을 발견했다. 손님 한명 들어오면 꽉 차는 10㎡(약 3평)짜리 매장에서 한 파티셰가 소보로빵보다 더 고소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바로 화제의 빵집주인 고재영(44)씨였다.
인터넷에서 고재영빵집을 찾아보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SNS)를 활용해 엄청난 매상을 올리는 동네 빵집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그에게는 SNS보다 더 중요한 성공 비결이 있다. 바로 ‘나눔’이다.
“빵집을 하면서 이웃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어요. 내가 가진 조그만 것을 나누면 훨씬 더 크게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했으니까요.”
그는 10대 시절부터 빵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의 최고급 베이커리에서도 오랫동안 일했다.
“평생 빵만 만들어 왔으니까, 빵에는 자신 있었어요. 내 이름을 내건 빵집이 늘 목표였죠. ‘빵만 맛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먹겠지’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 이름으로 빵을 만드는 일은 달랐다. 아침 7시에 나와 밤 11시까지 아무리 성심성의껏 빵을 만들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씨는 “한 4년 동안은 아주 힘들었다”고 했다.
그때 빵집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로 주변 가게 주인들, 동사무소와 군포시청 직원들이었다. 동네 행사를 위해 기부했던 빵 맛을 기억해 왔다고 했다. 빵집 명함을 가져가 소문을 내고 단체주문도 꼭 여기서 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면서 빵집이 자리를 잡았다. 그때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고씨는 소상공인 모임에도 나가고, 전국의 농어촌과 산촌에서 생산한 물건을 판매하는 ‘정보화마을’도 열심히 이용한다. 농민들이 직접 키운 당근을 주문해 당근빵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고재영빵집에서는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빵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꿀 김 천일염 키위 등 빵집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주변 가게나 인터넷에서 만난 분들이 파는 물건을 가져다 놨어요. 빵집 왔다가 꿀을 사는 분은 많지 않지만, 한번이라도 보면 눈에 익숙해서 다음에 그 가게에 가서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겠죠?”
계산대 앞에도 다른 빵집에선 마지막으로 매출 더 올리려고 초콜릿이나 쿠키를 진열해 놓게 마련인데, 고재영빵집에는 ‘굿네이버스’ 홍보 팸플릿이 딱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가 굿네이버스를 알게 된 것도 18년 전 은행 창구에 놓여있던 팸플릿 덕분이었거든요.”
고씨는 사실 빵을 만들어서 복지시설에 찾아가는 일을 즐겼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여기저기 후원을 했다. 하지만 빵집을 열고 영업이 안 되면서 하나씩 중단해야 했다. 그때 마지막까지 그만두지 못했던 곳이 굿네이버스와 참여연대였다.
“솔직히 고민했죠. 내가 이것까지 중단하면 정말 어려워질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최후의 보루라고나 할까. 내가 굿네이버스를 후원했지만, 내가 어려울 때 굿네이버스가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요.”
때마침 SNS가 등장했다. 고씨는 자신의 가게는 물론 주변의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면 상품을 보내주는 이벤트를 벌였다. 동네 빵집이 같이 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덕분에 고재영빵집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SNS에서 사귄 친구들이 상품도 협찬했다. 전국에서 주문이 몰려왔다.
“엊그제는 호주에 유학 가 있는 여자 분이 원주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빵을 보내 달라고 주문했어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고향집으로 보내 달라고 주문하신 분도 계세요. 동네 빵집이 아니라 전국, 아니 글로벌 빵집이 된 거죠.”
이곳의 빵은 맛도 좋지만 이름과 내용물도 독특하다. 2008년 대한제과협회 경기도지회가 주최한 빵·과자 경진대회에 나가 쌀겨로 만든 식빵과 충남 논산에서 난 홍시로 마들렌 빵을 만들어 상을 받았다.
‘영동에서 시집온 당근’ ‘대왕마마 소지지빵’ ‘딸기잼 발라 토스트’ ‘부러우니 브라우니’…. 이름부터 남다르다. 이웃과 함께 나누고 주변 가게들과 같이 살아가는 즐거움이 빵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고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프랜차이즈 빵집은 아무리 유명해져도 자기 집 앞에 똑같은 가게가 있으니까 거길 가잖아요. 하지만 우리 빵집은 전국에서 하나뿐이니까. 내가 만든 빵을 먹으려면 우리 가게로 주문을 해야 하지요.”
2012년, 고씨는 아주 유쾌한 경험을 했다.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놀러 갔다가 굿네이버스를 후원하는 가게인 ‘굿샵’ 가맹점 카페를 찾아갔다. 카페 주인과 얘기를 나누다 그분이 굿네이버스를 후원하게 된 계기가 바로 자신의 빵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도 사실 다른 빵집에서 일할 때는 굿네이버스나 다른 단체를 후원할 생각을 못했어요. 새벽부터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세상 얘길 접할 기회가 없거든요. 직장을 옮기려고 잠시 쉴 때 우연히 굿네이버스를 알게 돼 후원을 시작했는데, 그게 내겐 큰 보람이지요.”
빵집을 나가려다 고씨가 동참하는 또 하나의 나눔을 목격했다. ‘미리내 운동’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어려운 이웃 누군가를 위해 빵값을 미리 내거나 거스름돈을 기부하면, 누구든 빵집에 와서 그만큼 무료로 먹을 수 있고 근처 청소년 자활시설에도 전달하는 나눔 운동이다.
지난달 27일 고재영빵집의 페이스북에 반가운 소식이 올라왔다.
“제가 특강했던 학교의 학부형께서 학생과 함께 빵집에 들러 빵 1만원어치를 미리 내주고 가셨습니다. 미리 내주신 빵만큼 복 받으실 겁니다. 잘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고재영빵집은 ‘헬퍼스 하이(돕는 기쁨)’가 가득한 사랑의 빵집이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