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소치의 교훈
입력 2014-02-22 01:35
차라리 엉덩방아라도 찧었으면 덜 억울하겠다. 아니 착지할 때 비틀거리기라도 했으면.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처럼. 21일 새벽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펼쳐진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의 마지막 순서. 김연아의 ‘클린(무결점)’ 연기가 끝나고 잠시 뒤 전광판에 점수가 떴을 때 우리 국민들은 모두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우리의 연아’라서 무턱대고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해외 언론과 카타리나 비트 등 ‘피겨 전설’들의 반응을 보라. 그들은 “피겨 퀸 유나’가 금메달을 도둑맞았다”며 우리보다 더욱 분개하고 있지 않나. 피겨도 스피드 스케이팅처럼 실력만으로 겨뤘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김연아도 500m의 이상화처럼 금메달을 땄을 텐데 아쉽다.
실력이 아닌 그 무엇이 평가에 끼어드는 것이 어디 운동에서뿐이랴. 오는 27일 열리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자칫하면 또 다른 ‘김연아’가 생길 뻔하지 않았나. 공사의 62기 졸업생 140명 중 1등을 한 것은 여생도였다. 사관학교는 1등 졸업자에게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대통령상을 수여한다.
공사는 여생도가 1등을 하자 내부심의위원회를 열어 차석인 남생도를 대통령상 수상자로 바꿨다. 그녀에게는 2등상인 국무총리상을 주기로 했다. 대통령상은 안 되는데 국무총리상은 되는 그런 결격사유라는 게 무엇일까?
승복할 수 없었던 여생도는 국방부 성차별 고충처리 민원을 제기했다. 그러나 학교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민원을 철회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성차별이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지난 19일 개최된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국회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공사 이영만 교장은 “(여생도가) 종합 성적이 1등이었지만 자기개발노력,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이 차석 생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았다”고 밝혔다. 자기개발노력?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 그런 것들은 어떻게 측정하는 것일까.
결국 공사는 20일 여생도에게 대통령상을 주기로 번복했다. 성차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사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사는 1997년 육사(98년), 해사(99년)에 앞서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2003년 첫 여성 수석졸업자가 나온 이후 4번이나 여생도가 수석졸업을 했다. 혹시 ‘금녀’의 벽을 허물고 한 귀퉁이를 내주었더니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여성들, 그녀들에 대한 ‘경계경보’가 남성들에게 내려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성이라는 이유를 차이가 아닌 차별의 빌미로 삼는 곳이 어찌 공사뿐이겠는가. 취업경쟁에서 오로지 실력으로 겨루는 필기시험은 가볍게 통과한 뒤 면접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여성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는 여성들은 ‘남성’을 최대의 스펙으로 꼽는다고 한다.
남성들이여! 면접관으로 여성 응시자를 채점할 때, 상사로서 여성 부하를 평가할 때 소치에서 실력이 아닌 텃세 때문에 아쉬움을 삼켜야 했던 김연아를 부디 잊지 마시길. 그 순간 느꼈던 분통을 기억해주시길. 여성 인재의 발굴, 육성이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경력단절여성 구제 프로젝트만큼이나 국가 발전에 중요한 일임은 점시 접어두시더라도.
그런데, 세계 여론이 편파 심판으로 시끄럽다는데, 혹시 금메달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걸까? 공사의 편파적인 결정이 바로잡혔듯 소치 올림픽에서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이뤄지면 참으로 좋겠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