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시온] 부르카에 가려 있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입력 2014-02-22 01:36 수정 2014-02-22 11:19
아프가니스탄 축구 감독하며 복음 전달 이시온 선교사
“모두의 얼굴이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이 땅에선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런 얼굴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날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2004년 2월 20일 그가 기록한 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희망을 잃은 땅이었다. 사람들은 생기를 잃은 채 절망과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다. 내일이 없던 곳이었다. 하지만 정오의 해는 모두에게 비춰졌다. 악명 높은 반군에게도,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도 똑같았다. 이 거친 나라에 미래가 보였고, 기쁨과 활력이 넘쳤다.
이시온(가명·46) 선교사.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아프가니스탄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길을 목도했다.
“와줘서 고마워”
그가 아프간을 처음 밟은 것은 2002년. 한 선교단체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 이슬람권 국가들을 순회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을 거쳐 들어간 아프간 국경 도시는 한마디로 무질서의 극치였다. 반군 지배 시절 치열했던 전투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그러다 한 마을을 지났다. 양 치는 목동과 나뭇짐을 지고 가는 여인을 봤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구나. 그러면 하나님도 계실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서 들려온 목소리, ‘이곳에 와줘서 고맙구나.’ 솟아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이 눈물로 그는 이듬해 아프간 선교사가 됐다. 이 선교사는 지난달 13일 선교사역을 정리한 ‘천개의 심장’이란 책을 펴냈다.
그는 11년 동안 단 하루도 잠을 편안하게 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일이 오는 게 고통이고 두려움이었다고 했다.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밤을 보낸 적도 많았다 한다. 아프간은 내전 중이다. 외국인들은 목숨을 걸고 살았다. 납치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자살폭탄 테러가 횡행했다. 정부 관계자 암살 등은 일상이 됐다.
이 선교사는 아프간에서 활동하면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아내와 현지에서 산 것은 불과 10개월이 안 된다. 아내의 건강이 악화돼 여성으로서 그 땅에 사는 게 쉽지 않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했다. 아내가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그들은 ‘전화 부부’ ‘기도 부부’가 됐다. 전화하면서 만나는 부부, 기도하며 만나는 부부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이 땅에서 예배당 짓고 신학교 세우고 구제활동 하는 도식화된 선교는 적용 불가였다.
이 선교사가 축구팀을 맡게 된 것은 현지어를 배우면서 만난 교사의 권유에서다. 학창시절부터 축구를 했고 실업축구팀에서 선수생활까지 한 이 선교사의 경력을 알게 된 교사가 자기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엔 학교에서 정식으로 체육교사를 제안했다. 하지만 교육부의 불허로 채용되지 못했다. 대신 교육부는 이 선교사에게 정부의 체육부서 자리로 오라고 했다. 서로 그를 탐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학교와 교육부는 그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했다.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사이 이 선교사는 그 무렵 창단한 축구팀 선수들을 만났다. 성인팀과 유소년팀을 지도해달라며 무작정 찾아왔다. 6개월 시한을 두고 약속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그들은 이 선교사의 지도를 잘 따랐다. 첫 대회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팀은 아프간 사회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팬도 늘었다. 약속한 6개월이 끝나갈 무렵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도착했다. 정부 관료 한 명이 그를 데려오라고 했단다. 차를 타고 가서 만난 사람은 놀랍게도 아프간 부통령이었다. 부통령은 그에게 그 축구팀을 계속 지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통령은 종족 갈등 속에서 자기 종족 사람들을 축구를 통해 살리고 싶어 했어요. 침체된 나라 분위기를 스포츠를 통해 바꾸고 싶었던 거죠.” 중동 남자들은 축구에 열광적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으로 기술 전수를 원했다. 이 선교사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되살리게 될 줄 몰랐다. 어느덧 그의 신분은 선교사에서 축구팀 감독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계속 할 수 있겠니
선수 조련은 쉽지 않았다. 시간 개념이 없던 현지 문화 탓에 선수들은 제 시간에 모이지 않았다. 오후 2시에 연습을 시작한다고 말하면 4시가 돼야 모였다. 그는 항상 먼저 운동장에 나갔다. 그리고 선수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훈련했다. 그렇게 7년이 지나자 선수들은 그를 신뢰했다. 팀워크도 갖추게 됐다. 이젠 아무도 지각하지 않는다.
“선수들이 저를 지켜봤던 거예요. 외국인 감독의 말과 행동이 같은가 관찰한 거죠.” 선수들은 그때부터 이 선교사에게 마음을 열었다. 자기들의 얘기를 시작했다. 유소년팀 아이들은 모두 가난했고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축구를 시작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편부모 가정이 많았고 일부다처제 문화 속에 사는 애환도 털어놨다.
이 선교사는 아프간을 떠날 뻔한 적도 있었다. 2007년 이후 버티는 게 힘들었다. 쉬고 싶었다. 가족과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어느 날 축구팀 선수들 앞에서 사실상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감독님이 가지 않고 여기 남기 위해서 우리가 뭘 하면 좋을까요.” 이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할 말이 없었다.
또 다른 아이가 말했다. “감독님, 30년 전쟁을 치르면서 나라는 우리를 버렸고 부모도 우리를 버렸어요. 우리가 믿는 신도 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감독님은 우리와 함께 있었잖아요. 아버지처럼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즈음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어디에도 들어오라는 얘기는 없었다. 이 선교사는 아내의 편지를 붙잡고 밤새 울었다. 두 아이의 말은 주님의 말씀이었다.
이 선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 생각을 많이 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 역시 축구가 희망이었던 아이였다.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동굴 같은 집, 질풍노도의 고교 시절. 축구는 해방구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났다. 차갑고 비참한 삶에서 주님은 따뜻했다.
군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썼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고 감사한 경험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팀에서 일했던 그는 군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선수생활을 접고 군대를 다녀오면 선수 복귀는 불가능했다. 군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상무팀 입단이 유일했는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손가락 검지와 중지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동차 문에 손을 넣었지만 손가락은 멀쩡했고 급기야 공장 기계에도 손을 넣으려 했지만 하필 전기가 나가버렸다. 마지막으로 검지와 중지를 접은 상태에서 고무줄을 단단히 묶어두면 신경을 잃는다고 했지만 손가락만 아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입대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의병 제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학창 시절 교회에서 공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해머가 광대뼈를 때린 적이 있었다. 그 기록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선교사는 기자에게 손을 들어 보여줬다. 손가락은 예상보다 길었고 멀쩡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습니다. 손가락 하나 맘대로 할 수 없네요. 하나님의 개입이 아닐까요. 그때는 처절함 속에서 하나님을 배웠어요.”
홈 앤드 어웨이 미션
그는 선교를 축구 경기 방식의 하나인 ‘홈 앤드 어웨이 미션’으로 표현했다. “이전까지 선교는 홈경기 같았어요. 현지에서 집이나 단체를 세우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남의 집에 오는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숨기죠. 어웨이 방식은 우리가 그들 집에 들어가는 거예요. 내 것을 포기하고 그들 문화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죠.” 이 선교사에 따르면 어웨이 미션이 예수님의 선교방식이다.
그는 신명기 20장 1∼9절 말씀을 지니고 다닌다. 97년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처음 파송받을 때부터 지표가 됐다. “선교는 영적전쟁입니다. 항상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서 있는 곳을 확인해야 합니다. 선교는 눈물로 합니다. 사람들의 고난 속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