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재정 누수를 막아라] “자료 달라” -“못 준다”… 한국, 건보 운영기관끼리 힘겨루기

입력 2014-02-21 01:35


한국에서는 정부 산하기관끼리 자료 협조가 안돼 한 해 최대 1300억원이 낭비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자료만 공유해도 아낄 수 있는 건강보험 재정이 기관 다툼의 와중에 새나간다는 얘기다.

건강보험 운영 기관들인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벌써 몇 년째 “자료 달라” “못 준다”며 다툼 중인데 감독기관인 보건복지부는 감사원이 권고한 규정 개정조차 결론내지 못한 채 2년 가까이 미적대고 있다.

감사원은 이미 2012년 5월 두 기관 분쟁에 “심평원은 공단에 자료를 제공하라”며 건보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감사원으로부터 “관련 규정을 합리적으로 개정하라”는 통보를 받은 복지부는 지난 1월에야 고시 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나마 양측 반발에 밀려 최종안은 3월로 미뤄진 상태다.

◇“달라” “못 준다” 2년째 논쟁 중=의사는 치료 청구서를 건보공단이 아니라 심평원에 접수한다. 심평원은 의료서비스가 적절하게 제공됐는지 등을 살핀 뒤 청구액을 깎고 조정해 의료기관에 지급할 최종 금액을 건보공단에 통보한다. 돈은 건보공단이 지급한다.

만약 불만이 있다면 돈 주는 건보공단과 돈 받는 의료기관 모두 심평원에 이의신청을 하면 된다. 자료 분쟁은 여기서 발생한다. 만약 심평원이 ‘A환자 두통약 5알 중 2알(1000원) 삭감, 약제비 9000원 지급’이라고 결정했다고 해보자. 의료기관에는 조정 내역을 알려주는 반면 건보공단에는 총액만 통보된다. 건보공단이 몇 년째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는 건 심평원이 심사 조정한 ‘세부 내역’이다.

건보공단은 세부 내역만 제공해도 아낄 수 있는 건보재정이 345억∼1275억원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이의신청 대상을 분류하기 쉬워 건수도 늘고 승소 확률도 높아 의사에게 주는 돈을 더 깎을 수 있다는 논리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심평원이 어떤 치료행위와 약, 치료재료에서 조정을 했는지 모른 채 심사 잘못을 따지는 이의신청을 할 수 있겠느냐”며 “심평원이 법원의 역할이라면 양측(공단·의료기관)에 똑같이 자료를 주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심평원은 “심사권을 뺏겠다는 속내”라며 발끈한다. 심평원 관계자는 “이의신청으로 아끼는 금액은 굉장히 적다. 반면 인적 투자는 크다. 큰 효용이 없는 제도를 악용해 공단이 ‘우리가 심사를 한 번 더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건보·심평원 15년 심사권 논쟁=표면적으로는 자료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지만 내심에는 2000년 심평원 독립 이래 해묵은 ‘심사권’ 갈등이 존재한다.

지난해 건보공단이 사무장병원 적발 등 사후관리를 통해 환수한 금액은 2600억원이다. 심평원이 한 해 심사로 아낀 2700억원(2012년 기준)과 맞먹는 액수다. 심평원 예산이 연간 2200억원이라는 걸 고려하면 기관의 존재 이유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경우 심사조정 비율은 3%, 유럽연합(EU)은 5%대로 몇 년째 1% 미만을 맴도는 한국보다 높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지출을 아끼는 심사에 적극적인 건 공단일 수밖에 없다. 심평원 심사는 너무 느슨하다”고 불평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 관계자는 “연간 40조원 이상을 주무르는 거대 조직인 건보공단이 심평원을 통합해 심사권을 가져가겠다는 뜻”이라며 불쾌해했다.

갈등의 조정역은 복지부일 수밖에 없지만 “묘수가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양측 입장이 워낙 강해 조정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