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42년 만에…“행님아! 살아 있어줘 고맙다”

입력 2014-02-21 03:31


납북 어부 2명 금강산서 남한 가족 상봉

‘혹시 못 알아보면 어떡할까’ 하던 걱정은 기우였다. 혈육의 정은 42년간 헤어졌던 세월보다 훨씬 강했다. 고기잡이배를 타서 돈을 벌어오겠다던 16세였던 형의 앳된 얼굴은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까무잡잡한 얼굴로 변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측의 동생 박양곤(52)씨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형 양수(58)씨를 그렇게 만났다.

“행님아!”

상봉장 도착 전부터 수십 번 되뇌었던 인사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 한마디로 모든 슬픔과 미안함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형제는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얼굴과 체형이 쏙 빼닮은 북녘의 형과 남녘의 동생은 1972년 12월 이후 42년 만인 20일 금강산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극적으로 재회했다.

양수씨는 유달리 추웠던 1972년 12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배(오대양61호)를 탄 이후 소식이 끊겼다. 북측에 끌려갔다는 소식은 얼마 뒤에 들려왔다. 양곤씨는 “형이 어려웠던 집안에 도움을 주려고 배를 탔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고 흐느꼈다. 그는 “무엇보다 형님이 건강하시니 감사하다”고 안도했고, 양수씨는 훈장 등을 꺼내 보이며 “나도 당의 배려를 받아 잘 산다”고 동생을 안심시켰다.

두 형제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마치면 농사일을 거들고 땔감을 구하느라 변변히 놀아 본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42년간의 아픔에 비하면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양곤씨는 혹시 형이 부모 얼굴조차 잊었을까 하는 마음에 가족사진 여러 장을 준비했다. 북녘에서 따뜻하게 지내라고 옷과 생필품 등 선물도 챙겼다.

금강산호텔의 다른 상봉 테이블. 남측의 큰형 최선득(71)씨도 1974년 2월 배를 탔던 넷째동생 영철(61)씨를 꼭 4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홍어잡이배 수원33호를 탔던 동생 영철씨는 네 번째 승선 만에 소식이 끊겼다. 부모님은 북으로 끌려갔다는 넷째아들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떠났다. 선득씨는 동생에게 “40년 전 얼굴 그대로네. 내가 게으른 탓에 이렇게 늦게 만났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고, 영철씨는 “다른 식구들도 다 만나봤으면…”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상봉장은 눈물바다였지만, 분단의 냉혹한 현실도 그대로 드러냈다. 영철씨는 만남 도중 “원수님 덕에 만났다” “서로가 비방 중상하지 말고 통일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7남매 중 맏이인 선득씨는 준비해온 부모님 사진과 생필품, 약, 손목시계를 동생에게 건넸다. 생면부지의 조카 최용성 목사가 쓴 편지도 영철씨 손에 쥐어줬다.

박양수 최영철씨 등 1970년대 납북어부 2명을 비롯해 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정부에 의해 6·25전쟁 전시납북자로 인정된 북한의 최종석(93) 최흥식(87)씨도 포함됐다. 하지만 모두 사망해 각각 남쪽의 딸 최남순(65)씨와 아들 최병관(68)씨가 북측의 이복형제와 만났다.

이들 납북자 가족 4명을 포함한 남측 상봉 대상자 82명과 동반가족 58명은 북측의 가족 178명과 만나 여러 사연을 나누고 또 나누었다. 남측 상봉단은 2시간에 걸친 첫 단체상봉에 이어 북측이 주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해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 첫날 행사를 마무리했다. 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22일까지 계속된다.

금강산=공동취재단, 남혁상 기자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