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부패한 냄새 때문에 말문을 닫은 사람들… 정용준 첫 장편소설 ‘바벨’

입력 2014-02-21 01:36


2009년 등단 이후 시신이 된 ‘나’의 이야기를 다룬 ‘가나’ 등의 작품으로 평단의 기대를 받아온 소설가 정용준(33·사진)이 첫 장편소설 ‘바벨(문학과지성사)’을 냈다.

‘말’이 얼음 결정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아름답고 불길한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로 시작되는 소설은 이 동화를 읽으며 자란 천재 과학자 노아가 말을 결정화하는 실험에 실패한 뒤 말이 만들어내는 부패하고 냄새나는 물질 ‘펠릿’ 때문에 사람들이 말문을 닫고 새로운 바벨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SF적 상상력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입에서는 아메바와 같은 원생동물 모양의 파충류 표피 같은 축축한 물질 ‘펠릿’이 튀어나오는데, 정부당국은 노아를 가두고 실험을 종용하지만 노아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직은 펠릿의 모양만으로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펠릿의 외형만 봐도 직관적으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말이었을지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펠릿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을 싫어했고 심지어 그것과 마주치는 것을 꺼렸다. 펠릿은 외부로 드러난 마음이었고 밝히기 싫은 비밀이자 추문이었다.”(53쪽)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기자 ‘요나’ 역시 바벨이라는 시대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비판하지만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어떠한 투쟁도 하지 않는다. 소설의 키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정용준이 탄생시킨 펠릿이라는 물질에게 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어떤 말도 배우지 못하고, 멀쩡한 혀를 가지고도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극단적인 절망 끝에 스스로 혀를 자르는데 이는 모두 펠릿 때문이다. 인류 종말의 시대를 보는 것 같은 처절함속에서 문자 언어만이 간신히 소통의 도구로 기능하는 시대 바벨. 그러나 이러한 가상 상황은 타인이 내지르는 고통스런 비명에 무감한 현대인의 모습을 절묘하게 오버랩한다. 비록 가상이지만 바벨 시대의 교훈은 노아가 그랬듯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억제하기 위해 마음과 혀와 이빨로 싸워야 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정용준은 작가의 말에서 “어릴 때부터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 문제를 언젠가는 해결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소설로 쓰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