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애는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임철우 4년 만의 연작소설집 ‘황천기담’

입력 2014-02-21 01:36


소설가 임철우(60)가 4년 만에 낸 연작소설집 ‘황천기담’(문학동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황천’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풀어놓은 기묘한 이야기이다.

다섯 개의 연작 가운데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래전부터 막연히 생각해두었던 일종의 연작소설 형식의 글감이 하나 있긴 했다. 가상의 마을, 지리적으로 고립된 산골 소읍을 무대로 다소 특이하면서도 개성적인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그려내고 싶었다. 이를테면 윌리엄 포크너 소설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 혹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마콘도’ 같은 가상의 마을이었다.”(‘칠선녀주’에서)

‘요크나파토파’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미국 남부사회의 역사와 생활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으로 윌리엄 포크너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마콘도’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배경이 되는 마을로 역시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황천’은 임철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종결되는 장소이다.

첫 작품 ‘칠선녀주’는 출판사의 원고 독촉에 시달리던 작가가 소설의 무대가 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우연히 황천이라는 마을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과거 금광으로 흥청거렸던 그곳에서 작가는 오떡례에서 시작되어 그녀의 딸 황금심을 거쳐 다시 황홍녀로 이어지는 황천주조장의 여인 삼대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황금심이 황천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된 것은 바로 천하 명주 ‘칠선녀주’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인데, 한번 맛을 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한다는 그 황홀한 술은 명맥이 끊겼는데 황금심의 딸 황홍녀도 그 비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황천의 중학교 생물 선생으로 부임해온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나비길’과 금광 열풍이 일었을 무렵, 황금에 대한 집착으로 황천읍까지 흘러들어온 황충과 그의 아내 이야기를 다룬 ‘황금귀(黃金鬼)’를 거쳐 네 번째 이야기 ‘월녀’에서 황천 마을의 기묘한 분위기는 정점을 찍는다.

젖가슴이 네 개나 달린 월녀는 그 때문에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에 시집을 가지 못하고 도망을 나와 경성에서 큰돈을 모은다. 조선 전역에 금광 열풍이 불 때 그 대열에 합류해 황천에 들어와 밥집을 연다. 이후 잠시 외지로 떠나 있는 월녀는 모진 고초를 겪은 후 결국 죽기로 마음먹고 황천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몸을 던졌던 왕벚나무 옆 오래된 우물에서 기이하게 살아난 후 그 자리에 극장을 짓는다. 이제 호호백발이 된 월녀는 저마다의 아픔을 간직한 황천의 일곱 명 남자들에게 자신의 젖을 물리며 위로를 해주기로 한다. “‘오오, 내 자식들아! 어서 오너라.’ 월녀는 두 팔을 벌려 넷을 한꺼번에 품어 안는다. 그들이 조급하게 품을 파고든다. 아직 처녀의 몸인 월녀는 젖가슴을 활짝 열고 자신의 비밀스런 네 개의 유방을 드러낸다.”(‘월녀’에서)

마지막 작품 ‘묘약’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마치 5일장이 열린 옛 읍내의 눈발 날리는 주막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입담을 나누던 설화적 상상력을 한껏 펼쳐 보인다. 임철우는 작가의 말에서 “한 생애는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타인들의 기억 속에서 각기 고유한 판본으로 살아남아 떠돈다”면서 “인간의 수명처럼 저마다의 운명대로 잠시거나 혹은 아주 오랫동안까지 그렇게 세상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차고 끓어 넘치는 영원한 이야기의 강, 설화의 바다가 된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