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홍렬 (5) 어머니, 새우젓 장사 어려움 속에도 십일조 체득시켜

입력 2014-02-21 02:31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 충주 시내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중학생 때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등록금을 제때 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린 두 동생을 형수님께 맡기고 나와 함께 지냈다. 엄마 도움을 받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순열, 금열 두 동생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머니는 새우젓 장사를 시작하셨다. 새우젓 통을 들고 온 동네를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셨다. 장사 경험이 없는 어머니의 새우젓이 팔릴 리 없었다. 찾아가는 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한 사발도 팔지 못한 어머니는 해거름에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장사가 잘 되도록 해 주세요”라고 무작정 기도했다고 하셨다.

번번이 허탕을 치던 어머니는 판매 전략을 바꾸셨다. 어차피 집에 남겨 가 봤자 별 쓸 일도 없는 새우젓이니 막 퍼주시기로 한 것이다. 인심이 후하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새우젓 한 통을 30분 만에 다 팔 정도로 새우젓 장사는 번창했다.

집에 돌아오시면 항상 어머니는 나를 부르신 뒤 전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동전과 지폐를 나눠 놓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전부 얼마나 될까?” “4600원이요.” “새우젓 사는 데 3000원이 들었으니까 얼마가 남지?” “1600원.” “1600원의 10분의 1은?” “160원이죠.”

그러면 어머니는 160원을 가장 깨끗한 돈으로 따로 떼어서 옆으로 제쳐놓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160원을 봉투에 넣어 주신 뒤 주일에 꼭 교회 헌금함에 집어넣도록 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드리는 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신 것이다.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가지셨던 어머니의 이런 교육은 나중에 아들과 딸이 목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는 서울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등록금에다 하숙비와 용돈을 감당할 만한 사정이 못 됐다. 고민을 하던 때 중학교 선생님께서 현재 철도전문대학의 전신인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해 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국비로 교육받고 취직까지 문제없으니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부모님 허락을 받아 철도고등학교에 응시했다. 꼭 그 학교에 가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시 열차사고가 크게 났는데 그 시신들을 전부 철도고등학교 운동장에 안치했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다니면서 그 시신들을 본 것이다. 시험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 철도고교 학생이 됐다면 지금쯤 멋진 기관사가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입학금이었다. 지금 돈으로 12만원 정도 되는 입학금 6000원을 마련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애지중지하던 재봉틀을 전당포에 맡겨 마감 마지막 날에 입학금을 마련해 주셨다. 아버지께 그 돈을 전해 주면서 “오늘 저녁 5시 안으로 우체국에 가서 꼭 송금해 주세요”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런데 아뿔싸, 내 아버지여…. 아버지는 그 돈을 속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다가 친구를 만나 한잔 하신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우체국에 도착하셨으나 마감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다. 어머니는 다음 날이라도 그 입학금을 들고 철도고등학교로 가서 사정을 해 보자고 하셨다.

웬일인지 나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루 이틀 미적거리는 사이에 미등록 입학취소가 됐다. 철도고교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대부분 고교 진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낙심했다. 그러다 검정고시에 대해 알게 됐다. 잘만 하면 고교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바로 대학에 가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희망이 다시 생겨났다.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서울 응봉동에 있는 판잣집에서 살면서 장충동, 동대문을 거쳐 종로2가까지 걸어서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정리=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