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지붕, 문명의 안전에 대해

입력 2014-02-21 01:32


지붕은 무너지지 않았어야 했다. 설혹 강풍에 날린 간판이 덮치고, 폭우에 집이 떠내려가고, 쌓인 눈에 도로가 끊긴대도 지붕만은 버텼어야 했다. 현실이 어떤지 누군들 모르겠나. 공사장에는 물이 차고, 고공크레인이 넘어지고, 항공기는 활주로에서 미끄러진다. 멀쩡히 날던 헬기가 아파트 외벽에 부딪친다. 그런 일은 정말 일어난다. 웃으며 여행 떠난 초로의 순례객이 일면식 없는 이국 청년의 증오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가 품었을 악의와 매달 적금 부으며 설레었을 희생자의 행복 사이, 1만㎞ 밖에서 각자의 이유로 발효했을 두 감정의 거리가 너무 멀어 아찔해진대도 어쩔 수 없다. 그런 성긴 인과의 그물 속에 우리는 서 있다. 어쩌다 발이 엉켜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어느 밤 지붕이 내려앉는 일만은 막았어야 했다. 중력을 극복하고 조용히 무게를 버텨주는 것. 지붕이란 원래 그런 일을 하는 물건이다. 지붕이 쐐기 혹은 V자 모양으로 꺼지고 꺾였을 때, 사람들이 머리 위 지붕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는 너무 많은 것들이 늦어버렸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만으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의 강당 지붕이 왜 무너졌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언론은 연일 증언과 추측, 가설과 검증 사이를 오가며 ‘왜’를 자문자답 중이다. 경우의 수는 많을 것이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애초 설계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값싼 자재와 부실시공이 겹쳤을 개연성도 있다. 매뉴얼은 완벽했는데 실행 과정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중대한 질문이 따라붙는다.

지난 10일 울산의 자동차부품업체 공장에서 쌓인 눈에 지붕이 무너져 고교 실습생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슷한 사고는 다음날 인근 공장에서도 일어났다. 그렇게 울산에서만 7개 공장의 지붕이 주저앉았다. 전부 동일한 공법으로 만든 건물이었다. 그 많은 건물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부실하게 지어졌을 거란 추측에는 무리한 대목이 있다.

다른 버전의 이야기는 조금 더 난감하다. 이번에는 비난할 범죄자가 마땅치 않다. 설계하고 집을 짓고 감리를 하는 과정에 중대한 하자는 없었다. 문제라면 건물 짓는 기준 자체와 그 기준을 뛰어넘은 이상기후에 있다. 20∼30㎝ 적설량에 맞게 설계된 건물 위로 60㎝ 넘는 눈이 내렸다. 5m 쓰나미를 대비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 10m를 넘긴 파도가 덮쳤다. 어쩌겠는가.

앞뒤 들어맞는 허탈한 추론 앞에서, 무지가 아니라 지식이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던 20년 전 독일 사회학자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가 염두에 둔 건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스모그 같은 과학의 부산물이었겠지만, 오늘 한국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지식이란 눈 올 확률과 건축비, 단체손님 수익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영리한 자본의 리조트 경제학이다. 적설하중계수라는 태어나 처음 들어본 어휘는 폭설 확률과 안전이 아니라 생명과 경제성 사이 타협의 산물이다.

지붕이 붕괴하면서 지식과 기술이, 그걸 배우고 실행해온 소위 전문가들이 우리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믿음도 내려앉았다. 이제 한 사회학자의 제안처럼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기술 관료들의 합리성 독점이 가져온 폐해”(‘세상물정의 사회학’ 중)를 따져볼 때다. 머리 위 지붕의 안전을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는 건 합당한가. 경주 사고는 전문가들에게 다 맡기고 모른 척해 벌어진 일이다. 그 허술한 문명의 지붕 아래를 천진하게 뛰어다녔을 청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이영미 사회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