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당신의 여행가방

입력 2014-02-21 01:37


지금까지 가장 설레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60ℓ짜리 배낭을 샀던 때이다. 등산학교에 들어가며 제일 급했던 준비물이 배낭이었던 데다 그렇게 큰 배낭은 처음 보는지라 마냥 신나고 들떴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이름도 생소한 온갖 장비를 배낭에 넣고 북한산 백운대를 오른 첫 산행은 그야말로 지옥행이었다. 어깨를 찢을 듯 내리누르는 무게에 가슴이 턱턱 막히고 땀을 비오듯 흘렸다. 심해지는 통증에 눈물까지 흘렀다. 그렇게 생고생 끝에 오른 산에서의 첫 수업은 다름 아닌 올바르게 배낭 싸는 법이었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하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에서 다들 나처럼 단내가 날 만큼 힘들여 올라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사님은 바닥에 산행에 필요하다 생각하는 짐들을 다 늘어놓으라 한 뒤 여기서 무엇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답안은 모두 정답을 비켜갔다. 그리고 강사님은 설마 싶은 장비들도 냉정하게 제외시켰다. 그렇게 해서 싼 배낭은 아주 단단하고 삐져나오는 곳 하나 없이 날렵해 보였다. 그런 다음 내가 싸온 배낭을 펼치니 4박5일 종주에도 필요 없는 옷가지들과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배낭 싸기의 핵심은 무엇을 넣을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이냐임을 그날 배웠다.

깊고 험한 대자연 속에서 내 생명을 지키고 내가 꿈꾼 등반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 바로 좋은 등산의 시작이었다. 혹시나 하는 불안과 욕심에 넣은 짐들이 내 걸음을 붙잡고 지치게 한 일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구력이 붙자 배낭을 싸는 일은 산행이나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며칠 전 꽤 긴 시간 여러 사람과 함께 해외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출국수속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신기하게도 같은 일정과 목적지를 지닌 여행인데도 각자의 캐리어가 천차만별이었다. 저 여행가방엔 다들 무엇을 넣어왔을까 궁금했다. 마치 여행가방 안에 각자의 삶을 담아온 듯했다. 삶을 긴 여행이라 한다면 우리는 지금 내 목적지와 여정에 맞게 여행가방을 싸고 있을까. 내 어깨가 버티지도 못할 쓸데없는 짐들을 바리바리 담아놓은 채 이런 생고생이 없다며 헉헉대고 있진 않을까.

그 순간 어깨에 멘 배낭과 한쪽 손에 든 가방, 다른 손으로 잡고 있던 캐리어까지 한가득 짐의 하중이 나를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듯했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