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실려서라도, 부친 유언장 들고, 만나러 갑니다… 설레는 이산 상봉 가족들

입력 2014-02-20 02:32


누구 하나 애절하지 않은 사연이 없었다. 흰머리가 성성한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들은 저마다 생이별한 동생, 태중에 있던 아들, 세상을 떠난 혈육이 남긴 새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19일 강원도 속초 한화콘도에 모였다. 60여년을 기다린 이들에게 주어진 상봉 시간은 2박3일이다.

상봉자 중 최고령자인 김성윤(96) 할머니는 친동생 김석려(81)씨와 사촌, 조카를 만난다. 김 할머니는 해방 후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1946년 신의주에서 남편과 함께 남쪽으로 왔다. 당시 김 할머니의 부친은 자녀 6남매 중 김 할머니와 남동생 2명만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이번에 만나는 여동생 김씨 등 딸 3명은 너무 어려 신의주에 남겨 둔 것이다. 그때 헤어졌던 어린 여동생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건강 때문에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던 할머니는 동생을 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속초로 왔다. 김 할머니는 동생에게 줄 선물로 겨울옷을 준비했다.

1차 이산가족 상봉단에 마지막으로 합류한 김섬경(91) 할아버지는 수액을 매달고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 집결지인 속초 한화콘도에 들어섰다. 지난 18일 하루 일찍 속초에 도착한 김 할아버지는 감기증세를 보여 쓰러졌다. 김 할아버지는 “아무리 아파도 금강산에 가서 아들과 딸을 만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황해도 출신인 강능환(93) 할아버지는 헤어질 당시 태중에 있던 아들 정국씨를 만난다. 그는 63년 전 1·4후퇴 때 결혼 4개월이던 아내와 생이별했다. 당시엔 아내가 임신 중인 사실조차 몰랐다. 자신에게 60세가 넘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이산가족 신청 과정에서야 처음 알게 됐다. 아내는 헤어질 당시 28세 정도로 기억하는데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강 할아버지는 아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아들이 나를 얼마나 닮았을지 궁금하다”며 “아들이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알고 싶다. 아내 이름도 물어보고 과거를 다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 할아버지와 함께 남쪽으로 피란 온 큰형은 고향을 그리워하다 100세가 되던 해 눈을 감았다. 강 할아버지는 처제와 조카도 만날 예정이다.

백관수(91) 할아버지는 아내와 아들을 찾길 원했지만 둘 다 고인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헤어질 당시 3세였던 아들은 손자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떴다. 백 할아버지는 “나만 남한에서 편하게 산 것 같아 손자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며 “손자가 원망하는 눈으로 나를 볼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른 살이 된 손자에게 줄 선물로 초코파이를 샀다. 백 할아버지는 예전 중국에서 사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들을 찾아준다고 해 브로커들에게 돈을 전달했다가 허탕을 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날 등록시간보다 5시간이나 앞선 오전 10시30분쯤 이산가족 중 가장 먼저 집결 장소에 도착했다.

김철림(95) 할아버지는 아들과 손자를 함께 만난다.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김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됐다. 1·4후퇴 때 전쟁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이후 김 할아버지가 남한에 남기로 선택하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가족사진조차 한 장 가지고 오지 못했다”며 가슴을 치던 김 할아버지는 아들과 손자를 볼 생각에 잠을 설쳤다.

김명복(66)씨는 이번에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갖고 왔다. 이번에 금강산에서 만나는 누나 김명자(68)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언장에는 “내가 죽더라도 누가 명자를 꼭 찾아라”는 내용과 함께 황해도에 두고 온 부동산 내역도 담겼다. 아버지는 큰딸 명자씨를 북한에 두고 온 한을 안고 돌아가셨다.

상봉 대상자들은 저마다 어떻게 변했을지 모를 가족에게 건넬 생필품, 식료품, 겨울옷 등을 잔뜩 챙겼다. 궂은 날씨에 쇠약해진 건강 때문에 이동용 간이침대에 의지한 상봉자들도 여럿 보였다. 의료진 10여명이 상봉 대상자들의 혈압 등을 점검했다. 긴 세월에 머리는 희어지고 얼굴은 주름졌지만 마음은 헤어질 당시 안타까움 그대로였다.

이런 가운데 고령에 건강 악화로 상봉을 끝내 포기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18일에 이어 이날도 포기 의사를 밝힌 이산가족이 나와 상봉 대상자는 총 82명으로 줄었다.

속초=공동취재단,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