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최악 유혈충돌… 수도 키예프 물대포·화염병 난무, 최소 26명 사망·수백 명 부상
입력 2014-02-20 04:15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가 화해 국면에 들어선 지 이틀 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돌변했다. 시위대와 진압경찰 간 유혈사태가 발생하면서 20여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지난해 11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최대 규모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18일(현지시간) 반정부 시위가 발생해 정부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10명을 포함, 최소 26명이 사망했다고 영국 BBC가 보도했다. 이번 유혈사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부가 시위를 주도한 야권 지도층과 휴전에 합의한 지 이틀 만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시위대 2000명 정도가 의회 앞에서 다시 시위를 벌였고 일부가 키예프 시청 건물 재점거를 시도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경찰은 시위대가 해산 경고를 무시하자 오후 8시부터 물대포, 최루탄, 전기충격기를 동원해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사상자는 곳곳에서 발생했다. 시위대 응급센터가 설치된 ‘장교의 집’에서 시신 3구가 발견됐다. 한 여당 인사는 화염에 휩싸인 당사 안에서 질식사했다. 총상을 입거나 심장마비로 숨진 이들도 있었다.
권투 헤비급 세계챔피언 출신 야권 지도자 비탈리 클리츠코는 주변에 불길이 치솟는 연단에 올라 “이곳(독립광장)은 자유의 섬이며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UDAR)’ 대표인 그는 시위대를 이끄는 인물이다. 빅토르 프숀카 검찰총장은 “(시위를 선동하거나 주도한) 그 누구도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양측이 이처럼 격하게 충돌할 것을 예상하긴 힘들었다. 정부 측은 지난 14일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시위대 234명 전원을 석방했고, 시위대는 16일 키예프 시청 등 점거했던 건물에서 철수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그동안 유럽연합(EU)과의 경제협상 재개, 총리 퇴진, 시위처벌강화법 폐기, 시위 구속자 석방 등 유화 조치를 취해 왔다. 그러나 시위대 측이 주장해 온 대통령 자진 사퇴와 조기 총선에 대한 요구가 계속 평행선을 이어가자 갑자기 시위가 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우크라이나를 통제하려고 한 것도 시위 촉발 배경으로 비춰진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야누코비치 정부 측에 유리하게 흘러가자 20억 달러(약 2조1300억원) 규모의 현금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이미 약속한 150억 달러 원조의 일부였지만 이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와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분석했다.
돌연 시위가 격화되면서 이번 사태가 쉽게 가라앉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외신들도 3개월 동안 이어져온 시위가 결정적인 국면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유혈사태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갈등이 좀처럼 봉합되지 않는 데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야 할지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오랜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친러 성향의 동부와 친유럽 성향의 서부가 대립해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동부는 러시아어가 통용되고 러시아계 주민도 상당히 많다. 야누코비치 대통령도 동부 도네츠크 출신이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계인 서부 사람들은 자국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러시아보다 유럽과 가까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분열된 우크라이나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러시아와 유럽의 움직임도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미국을 비롯해 스웨덴 폴란드 독일 등은 일제히 우크라이나 정부 측에 유감을 표하며 유혈사태 종식을 촉구했다. EU 외무장관들은 20일 벨기에 브뤼셀에 보여 우크라이나 사태를 긴급 논의키로 했다. 캐서린 애슈턴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성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압제자와 인권 침해자들에 대한 제재 조치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선택들이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야누코비치 대통령 등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자산 동결과 여행금지 같은 방안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있다.
반면 러시아 외무부는 “이 같은 비극은 유럽의 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 위기 초반부터 극단주의 세력의 공격에 눈 감고 그들이 도발하도록 부추긴 결과”라며 서방을 비난했다.
클리치코 UDAR 대표와 아르세니 야체뉴크 조국당 대표 등 야권 지도자들은 19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만났지만 아무런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헤어졌다.
이용상 기자 sotong2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