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영’씨의 한국 걱정

입력 2014-02-19 01:36


그녀 이름을 ‘영’이라고 하자. 지금은 미국 시민권자인 영의 인생 역정을 듣노라면 소설 책 몇 권으로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70년대 초반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였다. 천주교 수녀원이 운영하는 공립 병원에서 일했는데, 당초 계약과 달리 하루 12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수녀원 측에 계약 조건 이행을 요구하다 ‘국제 미아’가 될 뻔한 영을 ‘구원’한 것은 미국 청년이었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영이 다니던 지방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청년은 몇 번 만난 한국 처녀를 잊지 못해 독일까지 날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미 동북부 뉴잉글랜드의 유서 깊은 영국계 가문인 시댁은 보수적이면서도 콧대가 높았다. 박사가 6∼7명이나 되는 가족들은 아시아의 듣도 보도 못한 나라 출신의 피부색 다르고 영어도 잘 못하는 여성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누이와 시동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열었지만 시어머니는 끝까지 곁을 주지 않았다.

변함없는 남편의 사랑과 지원이 물설고 낯선 이국에서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그리고 어떻든 이곳에서 살아남겠다는 그녀의 악착같은 의지도.

뉴욕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앵글로색슨계의 백인 신교도)로 불리는 미국 주류 계층을 가까이서 지켜본 영이 전하는 미국인들은 우리가 듣던 것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옛날 우리 사대부 집안만큼이나 자식들을 엄격하게 대하고 절제가 몸에 배도록 어린시절부터 훈육했다.

가족들의 유대도 매우 강하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어떤 점에서는 한국인들보다 더 가족간 속정이 깊습니다. 미국인들이 병들고 노쇠한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오해입니다.”

영이 한국 사회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병들고 나이 든 부모를 가족이 봉양하지 않는 것이 선진 사회인 양 여기는 오해와 무지 말이다. 그는 수십년 동안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한 경험을 대며 처음부터 양로원에 부모를 보내는 경우는 미국인의 10%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했다. 같은 집에 모시지 않더라도 자식은 물론 조카 등 친척이 노인 집 근처에서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랜만에 보게 된 한국드라마에 대한 놀라움도 털어놨다. 연속극에 폭력과 폭언이 너무 잦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뺨을 때리는 일은 예사고, 며느리와 자식이 시어머니나 부모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이 일상사처럼 나온다.

1남1녀의 자녀들은 명문대를 졸업하거나 다니는 등 훌륭히 성장했다. 2004년 처음으로 가족이 한국을 다녀온 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에게 한국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아들은 친절히 대해 주던 엄마 친구와 친척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들의 ‘정’이 무엇인지 실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아들은 계속 머뭇거렸다. 엄마의 재촉에 아들은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에게는 그토록 친절한 사람들이 ‘모르는 이들(stranger)’에게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느냐”고 했다.

2월 밤 미 버지니아주의 소도시에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가운데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근무한 이와 배우자들의 한국 얘기가 줄기줄기 이어졌다. 하지만 가슴에 오래 여운으로 남은 것은 한국인들이 소중한 보물을 보물인 줄 모르고 잃어가고 있다는 영의 안타까움이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