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만 양안관계 변천사… 대립→ 민간 교류→ 긴장→ 평화 발전
입력 2014-02-19 01:31
중국과 대만 관계는 분단 뒤 40년 가까운 대립 시기를 지낸 뒤 민간 차원 교류, 준(準)공식접촉, 긴장 시기 등을 거쳐 ‘차이완(차이나+타이완) 시대’로 불리는 평화발전기에 이르게 됐다.
국민당은 1949년 대만에 정부를 수립한 뒤 장제스(蔣介石)에 이어 장징궈(蔣經國) 총통 집권 때까지 ‘삼민(三民)주의 통일중국’을 내세우며 대륙과의 3불 정책(불접촉, 불협상, 불담판)을 견지했다.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때 줄곧 무력에 의한 대만 통일을 주장하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뒤인 1979년 1월 3통(통상, 통항, 통신) 및 4류(경제, 문화, 체육, 과학기술 교류)를 제의하면서 평화 공세로 돌아섰다.
대만의 3불 정책은 장징궈 사망 2개월 전인 87년 11월 대륙 내 친척 방문을 허용하는 ‘탐친법(探親法)’이 제정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9∼87년은 양안 간 대립 시기로 구분된다.
그 뒤 88년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은 대륙의 민심 쟁취를 위한 ‘신대륙정책’을 채택했고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협상에 의한 신헌법 제정을 제의했다. 90년 이후에는 대만이 대륙정책을 적극적으로 전환했다. 대만은 91년 2월 해기회를, 중국은 같은 해 12월 해협회를 각각 설립했다.
93년 양안 간 준공식접촉이 시작됐다. 해협회 왕다오한(汪道涵) 회장과 해기회 구전푸(辜振甫) 회장 간 회담(왕구 회담)이 93년 4월 싱가포르에서 이뤄진 것이다. ‘92공통인식’이 채택된 직후였다. 그러나 양안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5년 만인 98년 상하이에서 2차 왕구 회담이 열린 뒤 이 회담은 중단됐다.
대만에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집권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는 양안 긴장시기였다. 2001년 대만의 진먼(金門)·마주(馬祖)섬과 대륙 푸젠(福建)성 간 통상, 통항, 통신을 허용하는 ‘소삼통(小三通)’이 시행되기도 했으나 천 총통이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대만과 중국은 한쪽에 한 나라)을 발표하면서 양안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마잉주 총통 집권 뒤에는 해협회와 해기회 사이의 아홉 차례 양안회담에서 총 19개의 경제협정이 체결되는 등 ‘대(大)교류 국면’에 접어들었다.
베이징=정원교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