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찬희] 1994년, 그리고 데킬라

입력 2014-02-17 01:32

1994년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해다. 전쟁이 날까 하는 두려움에 전 국민이 촉각을 곤두세웠었다. 한반도가 들썩였던 이 해에 지구 반대편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1994년의 악몽’이 그것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이 해 2월에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시중에 풀린 돈이 너무 많아서 ‘거품’을 만든다고 보고 돈줄을 죈 것이다. 양적완화 축소다.

문제는 속도였다. 연준은 이듬해 2월까지 1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올렸다. 직전 5년 동안 3%에 묶여 있던 기준금리는 1995년 2월 6%까지 뛰었다.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르자 미국 채권시장에서 차입투자를 했던 채권 투자자들은 갚아야 할 빚이 늘고, 채권 가치는 점점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이쯤에서 멈추면 좋았겠지만 위기는 전염성이 빠르다. 풍부한 달러화를 등에 업고 1989년부터 급성장했던 멕시코가 직격탄을 맞았다. 금융시장에서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멕시코의 위기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인접 국가로 번졌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이 현상을 ‘데킬라 효과’(tequila effect)라고 불렀다.

위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데킬라 효과는 돌고 돌아 아시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997년 변동환율제를 도입한 태국은 급격한 외화 유출, 환율 변동 등에 시달리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외환위기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다.

최근 미국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로 돌아서자 시장에서는 ‘1994년의 악몽’을 떠올린다. 그때와 달리 연준이 돈줄을 죄는 속도에 신중하지만 터키,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등 신흥국 금융시장은 이미 널을 뛰고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호되게 얻어맞았던 우리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여전히 우리나라를 ‘상황이 다소 나은 신흥국’ 정도로 보기 때문에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매번 어디에서, 어떻게 바람이 부는지 귀를 쫑긋 세워 밖으로 내다보는 우리 경제의 신세가 억울하기도 하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소규모 개방경제의 숙명이라고들 한다. 그래도 수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내수가 있다면 어떨까. 든든한 내수 시장은 위기에 버티는 힘을 준다. 내수를 활성화하는 첫 단추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키우는 일이다.

김찬희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