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전세의 운명

입력 2014-02-17 01:38


국제통화기금(IMF)이 우리나라 전세제도에 경고를 보냈다고 한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이례적으로 ‘한국의 독특한 전세제도가 금융회사에 구조적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IMF는 ‘전세금이 많이 오르고 있는데 향후 집값이 하락하면 전세금도 하락해 집주인이 기존 전세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전세금을 대출해준 금융회사에 부담이 된다’고 설명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15일자 최신호에서 전세제도를 다뤘다. 제목은 ‘South Korea’s Housing Market - Lumping It’. ‘한국 주택시장, 뭉칫돈을 포기하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lump는 ‘덩어리’란 뜻인데 lump it은 ‘어쩔 수 없어 체념하고 받아들이다’란 의미가 된다. 월세 대신 뭉칫돈을 주고받던 한국 주택시장이 그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 전세와 작별하려 한다는 말이다. 지난달 20일에는 미국 부동산 컨설턴트 데릭 롱이 영국 가디언 기고문에서 전세제도를 소개했다. 롱은 “박근혜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배로 늘리는 등 가용한 모든 정책을 투입해 치솟는 전세금에 맞서고 있다”며 “한국이 이번 주택 문제를 푼다면 영국 보수당 정부도 따라해 볼 만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제도가 이토록 글로벌하게 관심을 끈 적이 있던가.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 쳐다보듯, 한국의 전세를 2008년 금융위기 주범인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들의 공통된 시선은 ‘전세의 위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세금은 사상 최장 기간인 76주 연속 상승했다. 집값 대비 전세금 비율은 최대 90%에 육박하고, 전세금 대출은 60조원에 달한다. 중산층을 위협하는 이런 수치에 주택시장이 결국 전세 시스템을 포기하게 된다면, 이는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한국의 압축성장과 산업화가 가능했던 이유로 어떤 이는 교육열을 꼽고, 어떤 이는 부지런함과 ‘빨리빨리’ 문화를 든다. 심지어 박정희 장기집권의 순기능을 말하는 이도 있으니 하나 더 보태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한국의 독특한 전세제도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압축성장과 산업화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자원이 부족했던 우리는 가공무역으로 경제를 일으켜야 했다. 원자재를 들여와 제품을 만들려면 공장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공장은 도시에, 노동력은 농촌에 있었다.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가려면 살 집이 필요한데 가난했던 정부는 그들에게 싼 집을 제공해줄 여력이 없었고, 은행은 기업에 돈 대느라 개인에겐 빌려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이 정부와 은행을 대신해 스스로 창안한 주택금융 시스템이 전세였다. 전세가 있었기에 농촌 사람들은 논밭 팔아 만든 목돈을 지키면서 도시에 집을 구했고, 도시 사람들은 문턱 높은 은행 대신 목돈 마련할 방법을 찾았다. 이렇게 창출된 노동력과 소비력을 토대로 한국 경제는 단기간에 놀라운 성장을 했고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반세기 이상 전세가 유지된 건 우리 경제가 계속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는 집주인에게 괜찮은 금리로 뭉칫돈 굴릴 곳과 집값 상승 보너스를, 세입자에겐 월급에서 주거비 떼지 않고 저축할 여력과 원하는 주거환경을 찾아 비교적 싸게 이주할 여유를 줬다. 전세제도가 위협받는 건 우리 경제가 더 이상 그럴 힘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약 전세제도가 더 위축된다면 우리는 집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태원준 사회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