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 우체국-일본 신복규 선교사] 전도지 내밀면 차갑게 외면…
입력 2014-02-17 01:37
사생활 침해했다고 경찰에 고발 조사받기까지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교회를 개척하기 전까지 일본 기독교의 상황이 어떤지 배우고 싶었다. 고 김의환 총신대 총장님의 친구인 우다 스스무 교수님의 소개로 1990년 도쿄의 일본동맹기독교단 수미다교회에 출석했다. 교회는 7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신도들 중에 어르신들이 많기 때문에 장례예배를 드릴 때가 많았는데 이 경험이 훗날 교회 개척에 큰 도움이 됐다. 일본에선 장례식이 무척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장례식 때는 향을 피우고 손을 모아 목례를 한다. 기독교식으로 할 때는 헌화를 하고 기도를 한다. 유족에게 간단한 위로의 말과 인사를 하는 것은 한국과 같다. 전야식과 고별식으로 진행되는 장례 절차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예배 준비와 안내, 주일학교 설교를 맡으며 수미다교회를 섬기던 중 허리통증이 심해졌다. 병원을 찾고 침도 맞았고 카이로프랙틱, 기공 등 12곳을 다니며 치료를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결국은 디스크 전문병원에 입원해 95년 3월 20일 수술을 받았다.
수술 당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날이 오옴진리교 지하철 사린사건이 났던 날이다. 갑자기 구급차와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TV에서 곧 뉴스가 나왔고 지하철에 독극물이 뿌려졌으며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고 했다. 한국의 신천지처럼 그곳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 집단이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반사회적인 사교집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존재, 악한 영에 의해 인생 파멸의 길로 갈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수미다교회 성도님들이 문병을 와서 치료비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신 선교사님은 건강하셔서 그동안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잘 모르셨을 겁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아픈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도와주세요.” 수미다교회 아오키히로 목사님의 사모님이 격려해 주셨다. 입원 45일 만에 벚꽃이 만발한 4월 초 퇴원했다.
퇴원 후 교회개척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수미다교회는 내 거취 때문에 당회 개념인 역원회가 열렸다. “교회를 개척해서 나가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일본어 예배가 끝나면 한국어 예배를 따로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밖에 나가면 경제적으로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교회에선 나의 갑작스러운 교회개척 의사 표명을 만류했다. 성도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그때에 나가도 될 것이라 권유했다. 결국 그해 6월 말까지 수미다교회에 출석하고 개척을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교회개척을 위해 몇 가지 원칙을 갖고 기도하면서 개척 장소를 찾아다녔다. ‘현재 몸담고 있는 수미다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교회를 얻는다. 수미다교회 출석성도는 절대 받지 않는다. 오래된 동네가 아닌 새로운 동네로 간다. 아파트가 많은 지역, 특히 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간다. 교회가 없는 지역으로 간다.’
아파트가 많은 새 도시를 선택한 것은 일본의 화(和)문화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가 형성된 오래된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게 쉽지 않다.
처음에는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도쿄 아사쿠사 지역을 찾아봤다. 그곳은 큰 절이 있는 곳이었다. 좀처럼 빈 건물이 없어 다른 곳으로 찾아다녔다.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니 건물을 좀 빌려주십시오.” “교회를 한다고요,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적당한 건물이 있었지만 번번이 거부당했다. 내가 외국인이고, 교회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인들은 외국인과의 마찰, 종교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또한 예산이 맞지 않아 틀어진 경우도 있었다. 약 3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다니다가 고이와역에서 가까운 2층 25평짜리 물건을 발견했다. 우선 알아본 것은 근처 교회가 있는지 여부였다. 파출소에서 지도를 살펴봤다. 혹시 해서 야키니쿠라고 불리는 한국 불고기 식당에 가서도 알아봤다. 근처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렇게 95년 7월 2일 우리 가족 4명이 예배를 드림으로써 동경성광교회가 시작됐다.
첫날부터 예배 후에 전도지를 돌렸다. 두 번째 주일 한국 사람이 한 명 왔다. 너무 감사했다. 마음이 바빴다. 일본 선교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가 먼저 부흥돼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교회에서 혼자 밥을 해결하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오직 전도와 말씀을 열심히 연구했다. 3년 만에 성도들이 제법 모였고 좀 더 큰 장소로 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98년 1월 한국 사람의 소개로 교회 운영에 적합한 넓은 장소를 찾았다. 집 주인과 직접 계약을 했는데 그만 이중계약으로 사기를 당했다. 다른 계약자도 한국인이었는데 그들도 장사를 하려고 집주인과 직접계약을 했다고 했다. 집주인에게 항의를 했더니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들은 비자가 없습니다. 불법체류를 하고 있어 입국관리국에 고발하면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되니까 문제없어요. 아무 걱정 말고 잔금을 지불하고 들어오시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일본인을 만나보지 못했는데 완전히 악질이었다. 그것도 한국 사람과 짜고 하는 나쁜 짓이었다. “나는 어려움을 당한 자를 도우려고 일본에 왔습니다. 그런 제가 그들을 쫓아내고 교회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건물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다른 한국인에게 건물을 양보했고 잔금을 치르지 않아 계약금 1500만원을 날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좋은 장소를 예비해놓고 계셨다. 도쿄 고이와에 위치한 현재 교회당 자리를 소개받아 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은행 융자로 교회당을 장만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시련을 통해 더 기도하게 하셨으며 당신만 바라보게 훈련을 시키셨다.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고이와 지역에 교회를 시작한 후 틈날 때마다 아내와 전도지를 돌렸다. 일본인들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강퍅했다. 전도지를 내밀면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인들은 사생활을 침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면전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여러 번 경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일본에선 유인물을 나눠주려면 경찰서나 역 사무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도지를 나눠준다고 하면 허가를 잘 내주지 않는다. 경찰서에서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기도 하고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한 적도 있다. 심지어 어떤 선교사는 전봇대에 전도지를 붙였다가 재판을 받은 적도 있다.
한국 교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나 열매가 맺어질까를 고민하기보다 열매는 우리 주님께서 맺어주신다는 생각에 전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신동경’ ‘아리랑 교차로’ 등 한국인을 위한 월간지에 전도지를 넣었다. 지금도 매월 마지막 주일이 되면 전도지를 배포하고 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전도서 11장 1절 말씀을 믿는 심정으로 말이다.
◇신복규 선교사 △1953년생 △예장 합동 총회 세계선교회(GMS) 소속 △1988년 일본 입국 △총회신학원, 일본 기독교 단기대학, 동경기독교신학교 졸업 △1992년 일본 선교사 파송, 일본 수미다교회 협력선교사 △1995년 동경성광교회 개척 △현재 일본 노숙자 급식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