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정수] 법전 위에서 잠자는 권리

입력 2014-02-15 01:36


법전 위에 누워 잠자는 권리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법조계의 격언이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법으로 보장된 권리는 소송으로 찾아먹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은 국민 누구나 누리고 부담해야 권리와 의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법은 언제나 최소한의 의무와 권리만을 규정한다.

사적 자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를 법으로 규제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나 하루 이틀 볼 사이가 아닌 회사와의 관계가 걸려 있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는 건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약자인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근로감독이라는 형태로 사적 자치 영역인 근로 계약 관계에 개입을 하게 된다. 법으로 정한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정부가 감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약자인 여성 근로자들은 ‘4대 장벽’에 가로막혀 직장을 떠나고 있다. 결혼·임신·출산·육아가 여성들의 직장 생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국가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의 장치를 마련해 산전후휴가, 육아휴직, 육아기근로시간단축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내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일소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지만 정부 대책을 보면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는 지난 4일 일하는 여성을 위한 생애주기별 경력유지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임신·출산과 양육 등 여성들이 직장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장벽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이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끌었던 건 남성 육아휴직 이용 비율을 늘리겠다는 방안이었다. 두 번째 육아휴직을 사용한 사람의 첫 달 육아휴직 급여를 통상임금의 40%에서 100%로 올리고 지급 상한액도 10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의 ‘아빠의 달’ 공약을 재설계한 것으로 정부가 상당히 공을 들인 부분이다. 정부는 “휴직으로 인한 소득감소를 줄여 남성 육아휴직을 활성화함으로써 여성의 육아부담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지급 상한액 기준으로 보면 50만원을 그것도 첫 달 1개월만 더 받을 수 있다. 육아휴직을 1년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매월 4만원 조금 넘는 인상 효과가 있을 뿐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자는 2293명으로 여성 육아휴직자(6만7323명)의 3.4%에 불과하다. 정부는 전체 육아휴직 사용 대상자의 규모가 얼마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기관들은 육아휴직 사용 대상 여성근로자의 10∼20% 정도만 육아휴직을 쓰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여성들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육아휴직을 남성에게 쓰라고 하면서 금전적 보상으로 월 4만원을 제시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이럼에도 정부는 남성 육아휴직자 비율을 여성 대비 10%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로 예산을 반영키로 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2년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육아휴직미 사용 이유로 ‘직장문화 및 분위기상 눈치가 보여서’라는 응답이 30.8%로 가장 많았다. ‘육아휴직 급여 수준이 낮아 경제 활동을 그만둘 수 없기 때문’(22.6%), ‘육아휴직 후 직장 복귀가 어려워서’(17.3%)가 뒤를 이었다.

육아휴직 신청을 거부하는 사업주들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가해 달라는 여성계의 요구에 대해 정부는 “현재도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은 법적 권리이며 사업주가 육아휴직 신청을 거부할 경우 5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면서도 육아휴직 및 출산휴가를 거부했다가 처벌을 받은 건수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서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게 우리 근로자들의 현실이다. 돈 몇 푼 올려준다고 남성들이 우르르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그에 따라 여성들이 육아부담을 덜게 된다는 정부의 인식이 한심할 따름이다. 여성근로자들이 법으로 보장된 모성보호 제도를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강력한 근로감독과 함께 개별 사업장에 대한 실태파악이 동반돼야 한다. 기업들도 여성 근로자들의 모성보호를 위한 대책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다행히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모성보호에 대한 인식이 싹을 틔우고 있다. 한화그룹과 삼성그룹은 임신 중인 직원에게 분홍색 또는 빨간색 사원증 목걸이를 지급해 다른 직원들의 배려를 유도하고 있다. LG전자는 사내 전산망에 임신 사실을 등록해 부서장이 배려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임산부들이 법전을 베고 편히 누워 잠자면서도 모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선정수 경제부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