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의 염치

입력 2014-02-15 01:36


장면 1. 지난 12일 한국 국회를 방문해 ‘올바른 역사인식을 통한 한·일 관계 정립’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전 총리는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존엄을 빼앗는 형언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신조 현 총리의 망언을 겨냥한 듯 “여러 가지 이상한 발언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부끄러울 따름이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1995년 총리 재임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공식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의 주인공이다.

장면 2. 2012년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일본대사관 앞.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는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로 ‘봉선화’ 연주를 하며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그는 70년대 한국의 빈민을 도운 ‘청계천 빈민의 성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우리 나이로 각기 아흔하나, 여든넷의 고령이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태평양전쟁 등을 겪었다.

장면 3. 최근 일본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시가 ‘가미카제 특공대’를 기리기 위해 그들이 남긴 기록물 333점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한다고 해서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했다. 어떻게 교주에 휘둘린 광신도들의 죽음과 같은, 즉 ‘자살특공대’의 기록물이 인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까? 해외 토픽으로 처리됐다.

장면 4. 요즘 일본에선 청각장애 작곡가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사무라고치 마모루가 벌인 희대의 사기극 때문에 충격에 빠져 있다. 사무라고치는 절대음감과 진동에만 의지한 작품 활동으로 ‘현대의 베토벤’으로 불렸다. 그만큼 일본 국민의 신화였다. 한데 그가 지난 18년간 대리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아 자신이 작곡한 양 발표했다는 것이다. 청각장애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사무라고치가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2번도 사기곡이었다.

사실 일본 국민은 선진국 시민답게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남을 배려하는 자세, 열심히 탐구하는 정신, 부지런함과 청결함 등은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한데 그들에게는 강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약점이 있다. ‘현대의 베토벤’ 사기 행각도 강자 숭배에서 나온 일본 국민성이 만들어낸 신화인 것이다. 당연히 약자에겐 잔인할 정도로 매섭다. 자연재해가 빈번하고, 사무라이 중심의 전국시대 등을 거치면서 그들의 DNA가 된 탓인데 문제는 리더들이 이를 철저히 이용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러한 일본 국민의 신화 욕구가 장면 3, 4와 맞닿아 있다. 그들은 편협한 지도자들이 내거는 국수주의적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굴종한다. 그것을 염치고 예의라고 생각한다. 아베의 약탈적 망언은 신화를 구하는 일본 국민 다수의 지지 없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댓글 등을 통해 격한 욕이라도 해가며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우리 국민은 권력자에게 늘 두려운 대상일 것이다. 이것이 시민사회이다.

반면 일본 국민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으로 통용되는 형식) 때문이라 이해되지만, 이제는 버려야 할 전근대의 유산이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마당에 아직도 이웃 국가를 적으로 삼고, 가미카제 특공대를 투입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는 자세는 인류 평화에 도움이 안 될 뿐이다.

장면 5. 당시 출국한 노무라 목사 집 앞. 우익들의 규탄이 쏟아졌다. 노무라 목사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외부출입을 삼갔다.

장면 6. 잔상. 무라야마 강연 후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치는 우리 의원들. 비뚤어진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국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전정희 디지털뉴스센터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