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덕규] 통일의 소명을 담아, 배낭을 매다

입력 2014-02-15 01:34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온 국민이 애타게 기다린다.

칠흑의 어두움도

서해의 그 어떤 급류도

당신들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72함 나와라

가스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하라.

772함 나와라

유도조정실 안경환 중사 나오라

보수공작실 박경수 중사 대답하라

후타실 이용상 병장 응답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772함 나와라

기관조정실 장철희 이병 대답하라

사병식당 이창기 원사 응답하라

우리가 내려간다

SSU팀이 내려갈 때까지 버티고 견디라.

772함 수병은 응답하라

호명하는 수병은 즉시 대답하기 바란다.

남기훈 상사, 신선준 중사, 김종헌 중사, 박보람 하사, 이상민 병장, 김선명 상병,

강태민 일병, 심영빈 하사, 조정규 하사, 정태준 이병, 박정훈 상병, 임재엽 하사,

조지훈 일병, 김동진 하사, 정종율 중사, 김태석 중사 최한권 상사, 박성균 하사,

서대호 하사, 방일민 하사, 박석원 중사, 이상민 병장, 차균석 하사, 정범구 상병,

이상준 하사, 강현구 병장, 이상희 병장, 이재민 병장, 안동엽 상병, 나현민 일병,

조진영 하사, 문영욱 하사, 손수민 하사, 김선호 일병, 민평기 중사, 강준 중사,

최정환 중사, 김경수 중사, 문규석 중사.

호명된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전선의 초계는 이제 전우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살아서 귀환하라

이것이 그대들에게 대한민국이 부여한 마지막 명령이다.

대한민국을 보우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하소서

우리 마흔여섯 명의 대한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듯한 집으로 생환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주소서.

배낭 맨 의사 김덕규 부산 동아의대 교수

“4년여 시간이 흘렀어도 이 글을 읽으면 아직도 마음 한쪽이 묵직합니다. 46명의 승조원 이름을 일일이 부를 때면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요.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나님께 구할 뿐입니다. 이런 갈망은 북한을 향한 구원의 기도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시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의 저자인 부산 동아의대 김덕규(59) 교수가 최근 밝힌 심정이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고 사흘 뒤 김 교수는 해군 홈페이지에 이 장문의 시를 올렸다. 당시 이른 아침. 교수실에 들어선 김 교수 앞에는 46명의 실종 승조원들 얼굴과 위치 등을 그래픽으로 처리한 조간들이 놓여 있었다.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하라’ ‘거치른 물살 헤치고 바다위로 부상하라’ ‘온 힘을 다하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울고 또 울었다. 시 ‘772함 수병은 귀환하라’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본보 2010년 4월 2일자 12면 보도).

그는 원래 시인도, 전문 작가도 아니었다. 글이라곤 주일 대표기도를 위해 미리 기도문 원고를 썼던 정도. 그런데 시 한 편으로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령님의 감동이지요. 그 시는 문학적으로 빼어나지 않습니다. 46명의 이름을 나열한 단조로운 글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시는 기도문입니다. 마지막 연에 ‘대한민국을 보우하시는 하나님이시여…’를 읽으면 누구나 알 수 있지요. 성령님이 저를 감동시켰고 그 느낌을 글로 썼던 겁니다. 사람들은 공감했고 감동해서 계속 퍼날랐지요. 이를 계기로 저는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북한, 탈북민을 품다

당시 천안함 함미가 인양된 게 부활주일 다음날인 월요일이었다. 김 교수를 비롯한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기적을 그렸었다. 주님이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해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것처럼, 함미가 인양되고 선실에 갇혔던 승조원들이 생환하는 모습을. 그러나 46명 모두 희생됐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성경은 가르치는데, 한 명도 아니고 46명의 생명을 앗아간 건 대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김 교수는 대들 듯 기도했다.

“그때가 신앙적 사색, 고뇌의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얻은 깨달음, 용서였다. 기도만이 용서할 수 있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기도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수 있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그는 북한을 살리고 북한 주민을 위해, 지하교회와 탈북민과 나아가 평화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는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아주 중요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과 지상을 연결해 놓으셨지요. 인자가 그 통로가 된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모략’의 내용까진 몰라도 적어도 결정적인 때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의 기도가 그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당길 수 있고 늦출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북한을 위한 기도 모임에도 열심이다. 매주 월요일 오후 7시30분 부산역 광장에서 열리는 ‘탈북난민 북송반대 촛불집회 및 통일광장기도회’에 참석한다. 이 기도회는 2012년 2월 부산 중국영사관 앞에서 있었던 ‘탈북난민 북송반대 촛불집회’를 계기로 같은 해 3월부터 매주 열리고 있다. 지난달 27일 100회를 맞은 이 기도회는 통일되는 그날까지 계속된다.

결과적으로 비극적인 천안함 사건은 김 교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주어진 일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는데, 홈페이지 ‘아침소리’(morningvoice.net)를 개설하고 세상과의 소통도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것, 폭침을 일으킨 자들을 용서하고 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길 것, 폭압정권은 반드시 멸망한다, 북한 주민의 구원을 위해 아니 그 구원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모든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 통일을 위해 아니 하나됨을 위해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이를 위해 2013년 ‘문학시대’를 통해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그해 12월 첫 시집 ‘살아만 있어다오’(베드로서원)도 출간했다. 탈북난민으로 떠돌다 다시 북한으로 끌려간 청소년들의 소식을 접하고 쓴 시다. “…총칼 앞에서/ 등에 진 배낭 속의 성경/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다오….” 그는 탈북민들을 초청, 시 낭송회를 열어 그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통일선교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평양말 성경 번역이나 탈북민 단체들을 후원하고 있다.

“자! 이제 우리가 깨어 기도하자/ 우리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자/ 기도의 분량이 모자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자/ 기도 응답을 초래하지 못하는 우리의 영향력 없는 기도 제목을 부끄러워하자/ 북한 지하교회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자.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데에 더욱 더 많이 투입하자.”(‘기도로 채워지는 하나님의 시간’ 중에서)

관심은 격려 위로 사랑을 낳고

김 교수 인생의 첫 장면은 어머니와 함께 드린 새벽기도회다. 어머니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 외조모의 올곧은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에겐 이런 신앙의 DNA가 흐르고 있다.

김 교수는 1955년 부산에서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유독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어머니는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할 정도로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 그래서일까. 김 교수는 늘 웃는다. 그의 미소는 환자를 대할 때 더 활짝 피어난다. 진정으로 어머니가 불신자 친척들을 섬기고 기도했듯 그 역시 환자를 만나면 진심으로 대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터치이다.

“사실 진료실에서 환자 얼굴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 몇 분 안 됩니다. 환자들은 의료진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면 됩니다. 저 나름 원칙을 갖고 환자들과 만납니다. 환자 얼굴 쳐다보기, 진맥해주기, 환자에게 격려의 말 한마디 해주기, 환자가 하는 호소의 말 가능한 한 끝까지 듣기입니다.”

이런 관심은 전문 의료 사역으로도 이어졌다. 2002년 부산시 동래구 온천교회(담임 안용운 목사)에서 처음 의료선교팀을 조직해 단기선교를 떠났다. 몽골 중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반납하고 10여 차례 의료 선교를 다녀왔다.

“저는 내과의사지만 선교지에 가면 소아과 환자도 돌봐야 합니다. 선교지에선 전천후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저를 의대에 보내셨고 내과를 전공하게 하셨으며 전문의가 되어 교직에 있게 하셨습니다. 만약 교직에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시간을 내 선교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선교지에서 환자를 돌보는 것과 함께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 현지 선교사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 격려다. 2011년 1월 26일부터 1주일간 인도네시아 먼따와이제도 시까갑섬에 있는 사랑신학대학에서 단기 의료 선교를 실시했다. 사랑신학대학은 예장고신 세계선교위원회 소속인 홍수희 정필녀 두 독신 여선교사가 세웠다. 무슬림 지역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런 밀림 속 척박한 땅에서 여선교사들은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봉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면 선교사님들이 정성껏 의료팀을 맞아줬습니다. 커피 한잔을 마시더라도 가장 예쁜 찻잔을 꺼내와 대접했지요. 선교사님의 특별한 사랑이 녹아있는 만찬은 또한 얼마나 풍성했는지…. 그분들은 이 땅에서 복음으로 풍성해지는 낙원을 꿈꾼다고 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모습에 감동한 김 교수는 귀국해서 시 한편을 썼다. 헌시 ‘낙원을 꿈꾸다’. “…발목까지 빠져/ 장화 신지 않고는 한 걸음 움직이기 힘든/ 질펀한 황토뻘 위에/ 비 피할 수 있는 공간만 있어도 좋으니/ 그런 처소를 세울 수나 있을까?// 빗물이라도 받아먹어야 살 수 있는/ 이 원시림 속에서/ 가냘픈 아녀자의 몸 하나 지탱할 수나 있을까?… 어느 새 서쪽 하늘 저녁놀이/ 바다 위에서 황홀하게 타고 있다./ 이곳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해 왔던/ 물음을 다시 해본다.// 나, 정말 여기에 그 낙원을 이룰 수 있을까?” 선교에 동행했던 사진작가 박다니엘 집사의 작품에 시를 넣어 두 선교사에게 선물로 전했다. 그 글은 선교사에게 격려이고 위로였다.

“저는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부르심을 받으면 즉시 그 부르심에 따라 복창하며 나서는 그 군인을 꿈꾸지요. 저는 빛의 갑옷을 입고 주의 말씀을 손에 들고 앞장서는 그런 군사를 그려봅니다.”

그에게 갑옷은 곧 배낭이다. 항상 배낭을 메고 다닌다. 평소 성경, 책 등을 넣고 다니는 배낭이 의료봉사를 떠날 땐 응급 의약품 등으로 채워진다. 김 교수에게 배낭은 주께서 부르시면 언제라도 부름에 응하려는 선교적 마음의 결단이자 표현이다.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말미. 김 교수는 애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하나되는 통일의 그때를 놓고 저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때가 찰 때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가슴 아프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시간, 그때를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는 신앙의 결단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부산=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