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강기훈씨 무죄] “국과수, 감정 일반원칙 위배… 성급·무리하게 판단했다”
입력 2014-02-14 02:31
법원은 13일 강기훈(50)씨의 자살방조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실했던 필적(筆跡) 감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부실 감정을 토대로 과거 수사와 재판을 담당했던 검찰과 법원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유서대필 사건’은 유서 필적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다. 1894년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는 유출된 프랑스군 내부 문건과 같은 필적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누명을 썼다. 강씨도 91년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와 동일 필체를 쓴다는 의혹을 받았다.
국과수는 91년 유서에 나타난 필적이 강씨의 것과 유사하다고 감정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강씨를 기소했고 법원도 강씨에게 징역 3년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7년 김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입수하며 사건은 새 국면을 맞았다. 국과수는 2007년 재감정을 실시했고 “낙서장 등의 필적이 유서 필적과 동일하다”며 강씨의 무죄를 뒷받침하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이번 재심 재판에서도 ‘유서를 누가 썼느냐’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검찰 측 신청에 따라 세 번째 국과수 감정을 실시했다. 지난해 1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07년과 마찬가지로 강씨가 무죄라는 취지로 감정 결과를 냈다. 재심 재판부는 감정 결과에 따라 91년 국과수 감정 결과는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먼저 유서 필적이 강씨의 필적과 같다고 본 91년 국과수 판단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국과수가 유서와 강씨 필적이 동일하다고 본 부분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며 “한글은 필체 사이에 유사성이 많아 일관적·반복적으로 동일한 부분이 있는지 엄격히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서와 김씨의 평소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 결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국과수는 김씨가 썼던 주민등록증분실신고서, 이력서 등의 필적이 유서와 다르다고 봤다. 하지만 김씨의 이력서 등은 모두 정자체로 작성됐고 유서는 흘림체로 작성돼 있었다. 재판부는 “국과수가 필체가 전혀 다른 문서를 비교해 필적 감정의 일반원칙을 위배했다”며 “무리한 감정이었고 결론도 성급히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91년 검찰이 강씨의 무죄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봤다. 당시 검찰은 전민련 측이 제공한 김씨의 수첩은 강씨가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수첩에 글자가 쓰인 부분만 30쪽이 넘고 여러 종류 펜으로 작성돼 있어 조작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강씨가 자신의 부모에게 보낸 엽서에는 ‘소자, 올림’이라는 존칭 문구가 기재돼 있는데 유서에는 그런 표현이 없는 점도 근거가 됐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