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설계자 정도전 ‘18일간의 비망록’… 김탁환 장편소설 ‘혁명’
입력 2014-02-14 01:34
“광활한 인간을 만났다. 가슴에 새로운 국가를 품은 호방함에 끌렸다. 나라의 잘잘못을 평하는 훈수꾼들은 언제나 많다. 그러나 미리 계획한 대로 한 국가를 부수고 한 국가를 세운 혁명가는 드물다.”(‘작가의 말’)
소설가 김탁환(46)의 장편 ‘혁명’(전2권·민음사)은 조선조 500년 전체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품이다. 그 주인공은 조선왕조의 설계자인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 고려 말 대장군 이성계의 추천으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인 성균대사성에 오른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상국가 수립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이성계가 실현해줄 것으로 확신한 급진개혁세력의 중심인물. 하지만 끝내는 정적인 이방원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으로, 정도전의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편년체 일기 형식으로 쓰였다.
“그(정몽주)는 남고 나는 떠나야 한다. 내가 남고 그가 떠나는 상상도 했었다. 그리 만들자는 제안도 받았다. 그도 몇몇 권유를 들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가 나를 내쳤고 내가 그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단언했다. 혹자는 그가 어명을 등에 업고 나를 없애거나 내가 대장군 이성계를 꾀어 그를 죽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지음(知音)의 나날을 음미하는 이는 없었다.”(1권, 27∼28쪽)
이씨 왕조를 세우려는 정도전과 대립했던 포은 정몽주가 경상도 봉화로 귀양 가던 날을 회상하는 이 장면은 정도전의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인 세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의 번민과 고독이 절절히 묻어난다.
김탁환은 형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실험을 한다. 당시 신진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다양한 문체(편지·가전체·동물우화·전(傳)·여행기 등)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하나의 문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그날그날 깨달음에 가장 합당한 문체를 선택함으로써 역사가 어떻게 문학적 옷을 입게 되는가를 보여 준다. “보주 감옥에 갇혀 일기를 쓴다. 참담하다. 뭔가 쓰지 않고는 가슴이 뛰고 팔과 다리가 떨려 견디기 어렵다. 내 생애 가장 불행한 날이다. 쓰기 싫은 문장을 이방원에게 보내는 서찰에 적고야 말았다. 자네 뜻대로 하게.”(2권, 175쪽)
한편으로 소설은 정도전이 어떻게 맹자에 기반한 성리학적 혁명가로 단련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1권, 192쪽)
장편 ‘혁명’을 시작으로 60여 권에 이르는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포문을 연 김탁환은 정도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책사로 흔히 정도전과 한명회가 꼽힌다.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인간이다. 한명회는 제도와 사상에 대한 고민은 없이, 수양대군을 용상에 앉히는 데만 집중한 반면 정도전은 법, 제도,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 등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새 세상의 전망과 방안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어 “오늘날 조선을 다루는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들은 말단의 재미만 추구하면서 역사로서의 품격이 사라지고 예술적 풍미를 잃은 작품이 적지 않다”면서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정사와 야사, 침묵과 웅변, 파괴와 생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생과 국가를 탐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