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양심과 배신 사이
입력 2014-02-14 01:32
“내부고발로 세상 물줄기가 바뀌고 사회에 충격을 주거나 경종을 울린 경우 적잖았다”
군사정권 시절 부재자 투표는 여당의 프리미엄이었다. 부재자 투표함을 개함하면 거의 예외 없이 여당 몰표가 쏟아졌다. 민주국가에선 상상하기 힘든 압도적인 득표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재자 투표자의 절대 다수는 군인이다. 서슬 퍼런 시절 짬밥을 먹어본 장정이라면 군 부재자 투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지금도 기억이 또렷할 듯하다.
부쩍 정신교육 횟수가 잦아진다. 병(兵)은 선거철이 임박했음을 피부로 느낀다.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길인가’ 투의 무한 반복 교육은 결국 투표 때 여당 후보를 찍으라는 메시지다. 이것만으론 불안했는지 투표일엔 공개투표에 대리투표까지 온갖 부정행위가 동원됐다. 지휘관들은 진급 등에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부하들을 다그쳤고, 전역까지 구만리인 힘없는 졸병들은 편안한 군 생활을 위해 한 표를 헌납했다. 대장보다 끗발이 세다는 몇 안 되는 말년 병장들은 ‘항명’하기도 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은 당시 군에 갔다온 사람이 얼마인데 그 같은 선거 부정이 뿌리 뽑히지 않고 수십년간 되풀이됐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정질을 당하는 모난 돌이 되기 싫어 내가, 네가 그리고 우리가 진실을 외면한 탓이다. 한 젊은 장교의 양심선언이 없었다면 짬짜미 투표가 더 지속됐을 게 분명하다. 1992년 3월 14대 총선을 이틀 앞두고 이뤄진 이지문 중위의 양심선언은 비정상의 군 투표문화를 정상으로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87년 6·10민주항쟁에 불을 댕긴 박종철군 고문치사 축소·은폐 사건도 교도관의 내부제보가 있었기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 이면에 감춰진 추악한 모습을 밝혀낼 수 있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역시 국정원 직원의 제보로 세상에 공개됐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을 비롯해 내부제보나 내부고발로 진실이 밝혀진 사례는 적지 않다. 어떤 경우 세상의 물줄기를 바꿨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거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조직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된 권력기관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이런 곳에서 합법의 탈을 쓰고 자행되는 부정은 그냥 묻혀버리는 경우가 적잖을 것으로 짐작된다. 내부고발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정부도 내부고발을 독려하고, 법으로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고 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이다.
법 1조에 취지가 담겨있다. ‘공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신고한 사람 등을 보호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민생활의 안정과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풍토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내부제보를 한 UBS증권 직원에게 무려 1억400만 달러(약 1100억원) 돈벼락을 안겨준 미국처럼은 못하더라도 오래 전부터 ‘내부고발자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는 선진 흐름과 보조를 맞추려는 형식은 갖춘 셈이다.
그러나 법과 현실 사이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내부고발자를 대하는 사회인식 또한 이율배반적이다. 내부고발자를 정의의 사도로 추켜세우다가도 정작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그 일이 생기면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는 노력보다는 내부고발자를 투명인간으로 만드는데 열중한다. 얼마 전 대학 이사장 개인 비리 의혹을 외부에 알린 대학교수 2명이 해임됐다.
공공부문도 오십보백보다. 비슷한 시기 문화재청은 최종덕 문화재정책국장을 직위해제했다. 숭례문 복구단장을 지낸 그가 펴낸 책이 문제였다. “숭례문 전통복원은 쇼였다”는 취지의 내용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문화재청은 기술고시 출신인 그에게 ‘직무수행 능력부족’ 딱지를 붙였다. 공익신고자보호법 취지가 무색하다.
그 어떤 치료도 예방보다 나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부고발은 더 큰 불법행위를 막는 예방효과가 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내부고발에 대한 정부의 자세와 인식이 지금 같아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요원하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