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재중] 1894년 조선과 2014년 한국
입력 2014-02-14 01:37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아 역사책을 꺼내 들었다.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급변하는 안보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갈 방향과 관련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국방부 청사에서 외교·안보분야 4개 부처 업무보고를 받은 뒤 주재한 오찬에서 한 참석자는 “지금 중국과 일본이 변화하고 있고 (동북아의) 판이 흔들리고 있다. 청일전쟁 당시의 위기라고 말하는 분도 있지만 판이 흔들릴 때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계를 120년 전으로 돌려보자. 조선은 1894년 2월 동학 농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대응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 농민군은 해산했지만 청군과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대치했다. 일본과 청나라가 남의 땅인 조선에서 서로 선전포고를 하기 일주일 전인 1894년 7월 25일 조선은 국왕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조선은 이제부터 자주국가이며 더 이상 조공을 하지 않는다.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청군을 아산에서 축출해줄 것을 일본 정부에 공식 요청한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바뀌자 신흥국인 일본의 힘을 빌려 쇠락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결국 일본에게 침탈의 길을 터준 꼴이 되고 말았다. 고종은 다시 러시아와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침탈을 막아 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조선이 군사력 등 독자적인 힘이 없는 상태에서 외교적인 전략만 구사했기 때문에 자국 이익에 몰입해 있던 열강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오죽했으면 당시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1루블의 가치만도 못하게 여긴다”고 말했을까.
다시 2014년으로 돌아오자. 중국과 일본은 역사문제와 영토 분쟁으로 맞서 있다. 양국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며 동북아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 사이에서 국익을 극대화하면서 지역의 안정을 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성공적으로 확대한 경험이 있다. 1951년 KADIZ가 설정된 이후 우리가 지속적으로 합리적인 조정을 요구했으나 일본의 협상 거부와 미국의 중립적인 입장 유지로 진전이 없었다. 마침 중국이 이어도 수역을 포함한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당시 국내외 안보전문가들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를 계기로 조성된 동북아 긴장 고조와 도전이 박근혜정부 안보정책의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미·일 간 대립 구도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국제규범과 관례에 기초해 관련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는 등 치밀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안보위기 상황을 KADIZ 확대의 기회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 앞으로 격변하는 동북아 안보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다만 교착상태인 남북관계가 아쉽다. 남북이 계속 대립한다면 동북아에서 서로의 입지만 좁아질 뿐이다. 6년2개월 만에 성사된 12일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마라톤 회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한 것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양측이 대화의 물꼬를 튼 만큼 14일 2차 고위급 접촉에서는 좀 더 유연한 자세로 임해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교류협력 확대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둬 동북아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김재중 정치부 차장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