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끝사랑
입력 2014-02-14 01:37
철철이 3월 신학기가 되면 우리 집엔 어김없이 새 식구가 늘었다. 병아리, 메추리, 햄스터…. 오빠는 학교 앞에서 파는 작은 동물들을 곧잘 사왔다. 그런 날이면 집으로 뛰어들어와 라면상자로 보금자리를 짓고, 밥그릇을 만들고, 이름 붙이기에 바빴다. 조그만 녀석들이 태생이 약한 데다 가스통에 깔리거나 베란다 밖으로 추락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 죽어 있는 몸체가 무섭고 끔직해 한번도 직접 치워보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은 늘 엄마나 오빠 몫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오빠 때문에 내내 아파트에서만 살았지만 강아지, 고양이 등 웬만한 동물들은 한번씩 다 키워본 거 같다. 그래서 나 역시 동물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살아 있는 것들을 돌보는 일에 서투르고 두려움이 앞섰다. 재롱부리며 뛰어노는 때만큼 아플 때도 많은 법. 때로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직면하기도 전에 슬픔에 짓눌려 숨어버렸다.
오빠가 ‘들인’ 새 식구 중에서 가장 오래 함께했던 녀석이 빼빼란 강아지였다. 17년을 함께하는 동안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처음 우리 집에 오던 날도 온몸에 부스럼이 나고 탈모가 된 상태였는데 매일 씻기고 약을 발라주는 일을 오빠가 다했다. 대신 나는 배변을 잘 못한다고 혼을 내거나 가끔 안아주는 군기반장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기쁨을 주었던 빼빼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땐 굉장한 통증에 시달렸다. 꼭 밤이면 시작되던 낑낑대는 신음소리에 벌떡 일어나 어르고 보듬는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돼 하는 수 없이 의학의 힘을 빌려 빼빼와 이별을 하기로 결정했다. 늦은 밤 동물병원에 누워 있는 녀석과 온 가족이 울며불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온 다음날. 출근길에 병원 앞을 지나며 들어가볼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 살아있을까. 아니면 벌써….’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고 함께해 주고 싶은 마음보다 두려움이 컸던 난 그날따라 늦게 오는 버스에 도망치듯 올라탔다. 그날 오후 빼빼는 어머니 품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들을 들이고 돌보는 일은 그들의 고통과 혹시 모를 이별의 순간을 직면하겠다는 것이다. 첫사랑만큼 끝사랑도 하겠다는 다짐이다. 그것이 성숙한 자의 사랑이리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어리거나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인 거 같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