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 공로’ ‘피해 회복’ ‘건강 상태’ 판결문서 되살아나… 재벌 엄벌주의 기류 바뀌나
입력 2014-02-13 02:32
“경영 공백이나 경제발전 기여 공로 등은 집행유예를 위한 참작 사유가 될 수 없다. 이런 기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2부는 2012년 8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여론은 이를 2009년 7월부터 시행된 대법원 양형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로 평했다. 전국 형사법관들은 그 얼마 뒤 부산에 모여 기업 범죄에 관대했던 과거 관행을 바꾸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1년6개월이 흐른 지난 11일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유죄로 인정된 배임액은 모두 1585억원. 양형 기준상 300억원 이상 배임죄의 경우 기본 형량 5∼8년에 감경 요소를 감안해도 최소 징역 4년을 선고하도록 돼 있다. 재벌 총수들에 대한 이른바 ‘3·5(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정찰제 판결’로의 회귀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김 회장에 대한 선고 이유로 ‘경영상의 불가피성’ ‘경제발전 공로’ ‘피해 회복’ ‘건강 상태’ 등을 들었다. 구자원 LIG 회장도 이날 피해자들과의 합의, 78세의 나이 및 수술 전력 등을 이유로 김 회장과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가 제시한 양형 사유는 과거 ‘3·5제’ 판결을 받은 여러 재벌 총수들의 판결문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2008년 7월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불법 정도가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중하지 않다”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동일한 형량을 내리며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고용창출 등을 통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2011년 10월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이 선고됐던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은 항소심에서 “향후 윤리경영과 사회공헌활동 다짐을 했다” 등의 사유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나왔다.
2004년 8월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1심 판결도 ‘산업과 교육발전 공로’ ‘국민훈장 수상 경력’ 등이 열거된 뒤 3·5제 선고로 마무리됐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용오·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역시 1심이나 2심에서 비슷한 논리로 3·5제 선고의 수혜를 입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