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오종석] 철조망을 5m 뒤로 물려라

입력 2014-02-13 01:37


“주는 걸 아까워하지 마라. 모든 게 투자다.” “주되, 무조건 줘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제공할 때는 거기에 걸맞게 바꿀 수 있는 제안을 꾸준히 해야 한다.”

지난해 여야 의원들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과거 통일 협상을 했던 은퇴한 관료들이 놀랍게도 똑같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서독이 동독과 협상하고 지원하면서 ‘철조망을 5m 뒤로 물려라’ 등의 작은 것을 요구하고 실현해 나가면서 통일의 물꼬를 텄다는 조언이다. 한국이 과거 햇볕·포용정책에 대한 ‘퍼주기’ 논란 등에서 벗어나 향후 남북 관계를 풀어갈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새누리당 남경필 의원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노무현정부 후반기인 2007년 12월 이후 6년 2개월 만에 12일 남북 간 고위급 접촉이 전격 성사됐다. 이산가족 상봉 합의에 이어 남북 관계가 모처럼 대화 모드로 접어들었다. 물론 ‘회담’이란 용어 대신 접촉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상호 탐색전 성격이 짙다. 하지만 일단 남북 고위 당국자 간 대화가 시작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

보수 지지로 통일기반 조성하길

남북 간 대화 모드는 올 초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 분위기 마련’을 희망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면서 예고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은 통일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내포된 것이었고, 이는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통한 남북화해 및 협력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햇볕·포용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한 박 대통령이기에 오히려 남북 관계를 급진전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적극적인 남북 교류협력과 통일을 위한 기반 조성은 보수세력의 동의 없인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 의원은 “보수세력의 가장 안정적인 지지를 받는 박 대통령이야말로 (남북 협력과 통일) 논의를 주도적으로 끌고나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민주당 원혜영 의원도 “남북 관계를 획기적이고 강력하게 풀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 바로 박 대통령이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외교부와 통일부는 지난 6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본격 가동을 전제로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 및 사회·문화·체육 분야 교류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나진∼하산 물류사업을 시작으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구체화하기로 한 것이나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올해 내에 착수하기로 한 것은 대북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인내심 갖고 대북협상 벌여야

우리는 그동안 ‘대화를 위한 대화는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진정성을 전제로 대화를 해야 하고, 뭔가 성과물을 도출하려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지난해 남북 관계가 최악으로 흘러가면서 북한이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일 것처럼 협박하고 개성공단 인력까지 철수시켰지만 우리는 형식적인 대화나 타협보다는 원칙을 지켜왔다”며 “그래서 이번 고위급 접촉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진정성과 투명한 원칙으로 일관된 대북정책을 펴온 가운데 북한이 먼저 대화를 제안하고, 우리가 받아들여 공개적으로 성사됐기 때문에 실효성도 클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동의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원칙에 안주하다 보면 융통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큰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가능한 대화의 끈은 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협상하고 주고받으면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독일 은퇴 관료들의 조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오종석 정치부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