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8) 4년여 ‘양화진’ 소송… 피끓는 법정 진술로 지켜내

입력 2014-02-13 02:31


1986년 6월 한창 선교기념관을 짓고 있을 때 유니온교회가 100주년협의회에 협약제안서를 보내왔다. ‘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양화진묘지에 대한 위탁 사용권을 유니온교회에 부여한다. 교회는 선교기념관과 묘지 유지·관리 책임을 진다.’ 유니온교회는 선교사 후손인 호레이스 언더우드가 주축이 돼 설립한 교회다. 협의회는 한경직 목사의 권유로 관리권을 넘겼다.

2000년 4월 한경직 목사가 9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하루하루 나그네 길이다. 이 세상에 좋은 씨를 많이 뿌려라.’ 유언이었다. 한 목사가 이사장이었기 때문에 100주년협의회가 교회 연합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소탈한 그는 내가 운전하면 조수석에 앉아 말벗하기를 좋아했다. 강원용 정진경 강병훈 목사가 뒤를 이어 이사장이 됐다. 나는 한 목사 별세 후에도 사무총장과 이사로 일했다. 이희연 사무총장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97년 천주교 성지인 절두산 일대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협의회는 양화진 성지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강원용 목사가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정부 관계자는 양화진 성지화가 기독교만을 위한 일로 비칠 것을 우려했다. 우리는 선교사들의 묘가 있는 양화진을 역사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정부 측에 계속 전달했다.

유니온교회가 양화진 위탁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다. 협의회는 2003년 9월 양화진묘지와 순교자기념관 관리를 전담할 교회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몇 사람이 이재철 목사를 추천했다. 그는 86년부터 양화진묘지 바로 옆 양화진길에 살고 있었다. 교단을 넘어 가장 신망 있는 교역자로 통하기도 했다. 정진경 목사와 함께 두 번 방문한 끝에 이 목사가 담임 목사직을 수락했다. 이 목사는 창립예배에서 2005년 7월 “제 역할을 ‘양화진 묘지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신앙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복음 안에서 밀알이 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양화진 묘에는 선교사와 가족 등 400여명이 잠들어 있다. 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을 성역화하고 한국교회 200주년을 내다보기 위해 설립한 곳이다. 나는 그제야 ‘이제야 한경직 목사님 뵐 낯이 있겠구나’라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2007년 양화진 사용권과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전이 시작됐다. 경성구미인묘지회와 유니온교회가 소송 주체였다. 나는 법정에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판사님, 저들은 한국에서 추방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는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기 위해 선교지에 옵니다.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 땅 내놓으라, 집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이들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법원은 결국 우리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지난해 2월 28일 “경성구미인묘지회의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고 선고했다. 4년3개월 동안 이어졌던 민사소송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토했다. 양화진 묘역을 자주 걷는다. 자주 머무는 묘지는 호머 헐버트(1863∼1949) 선교사의 묘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는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힐 때 조선 땅에는 많은 꽃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제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던 미 루비 켄드릭(1883∼1908) 선교사 묘지도 있다. 여기 남은 내가 더 해야 할 일은 뭘까.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