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설 목사의 시편] 세 살짜리 어른의 인간관계

입력 2014-02-12 01:32


세 살짜리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투정을 부린다. 주변의 관계와 형편을 살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칠 만큼 집착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현상에 대한 반응은 단순하고, 말은 어눌하며, 걸음은 불안정하다. 생각과 행동은 미숙하고 실수가 많다. 개인차는 있지만 성격발달 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의 가설에 의하면 이때 아이는 자율성-수치심을 갖는 시기이다.

어른의 정신연령이 세 살짜리와 같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우리들도 예외 없이 고집스럽고 미숙하며 자기만 알던 세 살짜리 시절을 경험하며 자랐다. 그러나 어른이 되었으나 세 살의 정신연령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면 문제는 다르다.

세 살짜리 어른은 어디서나 자기의 올바름을 주장한다. 자신과 남의 허물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남을 비웃고 험담함으로 자신의 부족한 것을 감추거나 보상받으려고도 한다. 이것이 이른바 성인아이의 자기 정죄의식(self-condemnation)이다. 따라서 성인아이 심리가 있는 어른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상담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슬픔(unresolved grief from childhood)”이 있다고 한다. 버려짐에서 얻은 슬픔, 온갖 종류의 학대들, 의존의 대상에 대한 결핍, 잘못된 가족구조 때문에 곤란에 빠지는 것 등 다양하다. 계부 밑에서 자라 상처와 결핍으로 인해 독재자가 돼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세 살짜리 어른은 좋은 인간관계와 훌륭한 리더십을 갖출 수 없다. 소통이 안 되는 고집스러운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살짜리 어른에게 사회적 관계의 유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른들의 세계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받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리라고 권면했다. 서로 존중하는 것이 좋은 관계의 원리임을 강조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이 세상에는 혼자만 잘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세 살짜리 어른은 히틀러처럼 위험한 일을 만들거나 인간관계를 악화시킬 위험성이 많다. 이런 사람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이나 주장을 절대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살짜리 어른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의 감성을 갖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결국 세 살짜리 어른은 관계의 장벽 때문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여주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