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7) 1984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사회에 큰 반향
입력 2014-02-12 01:31
내가 믿음의 길에서 외롭지 않았던 것은 동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기독실업인회(CBMCK) 활동에 동참했다. 74년 실업인회를 법인으로 전환할 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이곳에서 황성수 박사를 비롯해 최창근 정태성 최태섭 김인득 등을 만났다. 특히 최 장로는 나를 친동생처럼 살뜰히 여기셨다. CBMCK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통일찬송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성경을 배포하는 국제기드온운동에는 72년부터 참여했다. 74년부터 매년 기드온 세계대회에 임원 자격으로 참석한다. 손봉호 박사는 70년대 중반 내가 서울영동교회를 개척할 때 평신도 설교자로 동참했다. CBMCK 성경 공부 인도자로 바쁜 시간을 내줬다. 80년대 한국교회 윤리회복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손 박사는 84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주창했다.
나는 이 운동 발기인 대표였다.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다. (중략) 움켜쥐었던 것을 풀어놓고 내려놓아 나눔의 희락에 참여한다.’ 이 운동은 재산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누룩처럼 소리 없이 번지도록 한다는 강령 아래 무조직 무홍보 무사업 무회비 무회칙 5대 무(無)원칙으로 진행했다.
이 운동은 한국 사회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20년 동안 1000여명이 동참했다. 나는 손 박사가 87년 창립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회원으로도 참여했다. 이듬해 나는 한국장로회총연합회 8대 대표회장이 됐다. 이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조향록 정진경 유호준 목사 등 한국 보수 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협의체를 구상했다. 여러 사회 시책에 교회의 불협화음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운동 취지에 공감해 평신도로 적극 참여했다. 한 목사가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았다. 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설립됐다. 나는 1대 박맹술, 2대 정진경, 3대 이성택 목사를 보좌하는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80년 말 국내에서는 쌀 풍작으로 쌀값이 폭락했다. 정부가 쌀 소비 진작책을 마련할 때다. 예수원 대천덕 신부가 한 목사에게 쌀 소비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90년 2월 한기총 산하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를 설치했다. 3월부터 소년소녀가장 사회복지단체 및 장애인 수재민에게 사랑의 쌀을 전달했다. 북한 주민에게도 전달했다. 7월부터 필리핀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인도 사할린 몽골 수단 에티오피아 등에 전달했다. 이 운동은 국내는 물론 세계에 한국 교회의 위상을 알리고 선교의 문을 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기총 설립 초기부터 외부에서는 관변 단체라는 시비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선교에 힘쓰려고 애썼다. 하지만 몇 년 사이 한기총이 교단 정치의 중심으로 전락했다. 급기야 회장 선거 비리로 몸살을 앓았다. 임원 일부가 권력 주변을 맴돈다는 소문도 있다. 아마 예수가 보신다면 “독사의 자식들아”(마 3:7)라며 모두 쓸어버릴지 모른다. 교회는 한국을 이끌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95년부터 대통령을 위해 매월 25일 기도하는 모임 ‘25기도모임’에 참여했다.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을 위해 처음 시작했다. 국민들이 김 대통령에게 실망한 듯했다. 크리스천 대통령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우리 몫은 기도와 간구다. 주관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