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오지 말라”… 문 닫는 유럽

입력 2014-02-11 02:31


스위스에서 자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 수를 제한하는 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경제난에 허덕이던 동유럽 국가 이민자들을 더 이상은 무작정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영국과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도 이민자 규제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국경을 허무는 데 주력하던 유럽이 이제는 이민자들에 대한 문을 걸어잠그려 하고 있다.

◇이민자 덕분에 발전한 스위스, 이민 규제안 통과=스위스 정부는 9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회원국 국민의 이민을 제한하는 이민 규제안이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50.3%를 얻어 통과했다고 밝혔다. 투표율은 최근 10년 새 최고치인 55.8%를 기록해 국민 관심이 높았음으로 보여줬다. 몰려드는 유럽 이민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베풀고 일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탓이다. 규제안에는 기업이 스위스 국적자를 우선 채용토록 하는 규정과 이민자의 복지 혜택을 줄이는 내용도 담겼다.

스위스는 과거 수백년간 이민자들이 경제 성장을 주도해 왔다. 1500년대 위그노(프랑스 칼뱅파 신도)들이 제네바에 들어와 시계산업을 일으켰다. 1800년대에는 폴란드 이민자가, 1900년대 초에는 독일 이민자가 정밀기계, 식료품 산업 등을 주도했다.

총 인구 800만명 정도의 작은 나라 스위스에는 요즘도 연간 8만명 정도의 이민자가 들어온다. 전체 인구 중 외국인 비중은 27% 정도로 유럽에서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많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탄탄한 경제가 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것이다. 이번 국민투표가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스위스의 이민 규제안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EU와 2007년 맺었던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이민을 보장하는 내용의 협정을 3년 이내에 수정해야 한다.

◇유럽, 이민 규제 도미노 조짐=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스위스의 이민 규제안 통과로 인해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에서도 우파 정당이 추진하고 있는 이민 규제 움직임이 힘을 얻을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의 극우 정당 영국독립당(UKIP)의 나이젤 파라지 당수는 “현명하고 강인한 스위스 국민들이 브뤼셀 관료(EU)의 위협에 맞섰다”고 밝혔다. 프랑스 국민전선도 성명을 내고 “프랑스도 대규모 이민 유입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자유당(FPO),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역시 “스위스처럼 이민 유입 제한을 국민투표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독일 국민들도 빈곤 국가인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이주민들이 유입되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설문조사 기관 포르자가 국민들에게 올해부터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인의 이주가 전면 자유로워진 것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잘못됐다’는 응답률이 42%에 달했다고 현지 일간 빌트 등이 보도했다. 복지 혜택을 누리기 위해 이민오는 이른바 ‘빈곤 이민’에 대해서도 ‘우려한다’는 답변이 60%나 됐다.

각국 정부들도 이민자들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독일 정부는 최근 빈곤이민을 다루는 위원회를 내각 안에 구성키로 했다. 영국은 이주 3개월 이전에는 실업·주택 수당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이미 이주민 규제 조치를 시행 중이다.

◇EU, “하나의 유럽 정신 훼손” 반발=EU는 스위스와의 관계 전반에 대해 재검토에 들어가는 등 이 같은 이민 규제 분위기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비비안 레딩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유럽 단일 시장은 스위스가 유리한 것만 골라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이같이 밝혔다. EU 핵심국들이 이민자를 줄이려는 움직임은 EU의 통합 정신에도 크게 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동유럽인들의 서유럽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상당하다. 자신들이 아쉬울 때는 ‘하나의 유럽’을 강조하다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스위스 경제가 가장 크게 의존하는 EU와의 무역 자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디디에 부르크할터 스위스 대통령은 유럽 주요 국가를 돌며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방침이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