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6) “조선족 청년들에 주님 사랑을” 연변과기대 설립 지원

입력 2014-02-11 02:31


다니엘학교 이전 장소가 서울 내곡동으로 확정됐다. 임대 계약도 이뤄졌다. 주민들은 구청에 여러 차례 반대 민원을 제기하고 이사장실을 찾아와 농성을 벌였다. 나는 정신지체아동들이 처한 상황과 우리들이 하는 일을 상세히 적은 장문의 호소문을 집집마다 발송했다. 주민 대표를 만나 간곡하게 설득했다. 요지부동이었다. 지친 나는 천마산기도원을 찾았다. ‘하나님, 이 사태를 해결할 이는 당신뿐입니다. 해결의 열쇠는 인간의 지혜가 아닐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온 다음 날 주민 대표들을 만났다. “부디 광장동에 있는 다니엘복지원을 한번만 방문해주십시오.” 주민대표들은 내 요청에 응했다. 며칠 뒤 그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습니다. 부모도 하기 힘든 일들을 하고 계시더군요. 여러분이 말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사시는데, 우리는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졌습니다.” 드디어 구령회 법인과 주민대표, 구청 사이에 양해각서가 만들어졌다. 1997년 건물을 준공하고 이전을 마쳤다. 이후 나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하나님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운동이든 사회사업이든 내 소임이 사라지면 내가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을 작곡한 교회음악가 박재훈 목사와는 1960년대부터 교회음악협회에서 교류했다. 그러다 박 목사가 70년대 초 이민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95년쯤 박 목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주변 지인들을 모아 ‘박재훈 목사 후원회’를 조직했다. 십시일반 모아 96년부터 2년 동안 후원을 했다. ‘산골짝에 다람쥐’ ‘코끼리 아저씨’ 등 다수 동요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박 목사는 2012년 오페라 ‘손양원’을 작곡하기도 했다. 고령에도 여전히 작곡하는 박 목사의 열정이 감탄스럽다.

89년 가을 김진경 박사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와 그의 인연은 56년 일간지 기자로서 학보사 기자이던 그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준 게 다였다. “장로님, 제가 호텔에서 3주 동안 무전취식한 죄를 쓰게 됐어요. 중국 정부로부터 옌지(延吉) 지역에 대학 설립 허가를 받고 한국에 후원자들을 만나러 왔어요. 근데 소개해준다던 지인이 줄행랑을 쳐버렸네요.”

나는 하나님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예비한 이가 김 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북방 선교를 해야 한다는 말은 무성했지만 실효성 있는 방안은 전무했다. 재중동포가 모여 사는 옌지에 대학을 설립,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젊은이들을 교육한다는 게 그의 꿈이었다.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조선족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북한에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선교입니까?”

나는 그와 함께 한경직 목사를 찾았다. 한 목사도 “이같이 좋은 기회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위해 예비한 섭리”라고 감격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국내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와 연결되면 한 목사에게 전화를 바꿔드렸다. 곽선희 옥한흠 홍정길 이종윤 목사 등이 적극 후원했다. 이를 기반으로 91년 연변조선족기술대학이 설립됐다. 2년 뒤 4년제 연변과기대가 됐다.

내 생활신조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다’(행 20:35)는 성경 말씀이다. 자랑으로 비치진 않을까 우려된다. 남을 돕는 가운데 내게 늘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