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스와질란드 김종양 선교사] “선교비 안오면 떠나겠습니다”… 우편사서함 보고 ‘깜짝’

입력 2014-02-10 01:32


내가 아프리카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은 스와질란드로 오기 전 말라위의 사역 덕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프리카 문화와 풍습을 배우도록 연단하셨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와 한국병원선교회 독일지부의 파송선교사로 아프리카 대륙선교의 큰 비전을 가지고, 중앙아프리카 말라위에 도착한 것은 1985년 11월. 사역 지역은 말라위 수도인 릴롱궤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브란타이다. 그곳 원주민 목사님은 영국 신학교에서 만났던 더피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나를 선교사로 초청하신 분이다.

밤에 도착한 브란타이 공항은 작고 초라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10여명의 원주민들이 노래하며 춤추면서 나를 맞이했다. 나는 반가워 원주민 목사님들과 교우들을 끌어안고 기뻐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아프리카에 왔지만 원주민들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한데 나를 이렇게 맞는 것을 보고, 앞으로 복음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날 이후 세 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첫째는 비자 문제였다. 말라위 정부는 선교사 비자를 내줄 수 없으니 방문비자로 1개월만 있다 돌아가라고 했다. 어영부영 3주가 흘렀다. 원주민 목사님과 함께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릴롱궤에 있는 종교과장을 만나 나의 선교비전을 설명했다. 종교과장은 다행히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내가 치안국장을 만나 협조를 구할 테니 기도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결국 방문비자를 2개월 더 연장하도록 치안국장이 이민국장 앞으로 편지를 썼고, 2개월 뒤 선교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선교비 조달 문제였다. 말라위에 도착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약속된 선교비를 받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빈민촌의 원주민 집사님 가정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모기가 어찌나 극성을 부리는지 가려워 몸을 긁고 다녔다. 바퀴벌레와 도마뱀이 방에도 나타났고, 음악을 좋아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라디오를 큰소리로 틀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손으로 밥을 먹는 아프리카 풍습 때문에 밥 먹기 전 대접에 물을 받고 손을 씻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씻고 난 뒤 차례가 돌아오면 물이 이미 더러워 손을 담그는 것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원주민의 선교사로 온 내가 이들의 생활에 흡수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들을 전도하겠는가’라는 생각에 그냥 더러운 물에 손을 담갔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지만 배가 고프니 이내 밥을 먹곤 했다.

힘이 없어 보이는 내게 원주민 집사님은 “아프리카 빈민촌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우리 가족과 온 교회가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선교사님께 고통을 허락하시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새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잠시나마 회의에 빠졌던 나를 원주민 집사님을 통해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면 병자를 위해 기도했다. 교인의 절반가량은 신발이 없어 맨발로 걸어오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환자들이었다. 가난에 헐벗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원주민을 도우려면 먼저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복음사역을 힘 있게 펼치려면 능력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내게 원주민 환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또 귀신 들린 자에게 담대하게 안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달라고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얼마 뒤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셨다. 환자들을 위해 안수하며 기도할 때 치료의 은사가 나타났다. 귀신 들린 자를 위해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나갔다. 이후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3개월 만에 몸무게가 16㎏나 줄었다. 기운이 없어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나는 또 투정하듯 성원기도를 했다.

“곧 있으면 이곳에 온 지 100일이 됩니다. 만약 100일 안에 약속된 선교비를 보내주시면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아프리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나도 선교비를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말라위를 떠나겠습니다. 만일 제가 아프리카를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또한 저의 큰 수치가 될 것 입니다.”

99일째가 되는 날에도 사서함을 확인해 봤으나 역시 선교비가 없고 편지도 한 장 들어 있지 않았다. 100일째 날 아침, 말라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하며 짐을 싸놓고, 마지막으로 사서함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독일병원선교회에서 보내 온 500달러 수표가 한 장 들어 있지 않은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우체국 직원을 찾아 문의하니 우체국 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그 수표 말고도 두 장이 더 있다”며 500달러 수표를 2장 더 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병원선교회의 회계 담당자가 내 사서함 번호를 잘못 알려 주는 바람에 독일에서는 지난 3개월간 다른 사서함으로 선교비를 보냈던 것이다.

성원기도 100일째가 되는 날 이것을 알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뤄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아프리카에서 쓰시기 위해 연단하시며 새롭게 만드신 기간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너무나도 치밀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 일은 두고두고 살아있는 좋은 간증이 됐다. 그 이후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일을 기억하며 고난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었다. 빈민촌의 원주민 집사님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굶주리고 헐벗고 병으로 고생하는 그들의 실정을 몰랐을 것이다.

말라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하나님께서는 서투른 영어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길을 내시었다. 수천명이 모이는 전도 집회에 나를 부흥강사로 초청하셨다. 설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다. 귀신 들린 자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다.

원주민 목사님과 함께 섬기던 60여명이 모이던 작은 원주민교회는 2년 만에 4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말라위의 여러 지방에 30여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86년 말라위에서 아프리카대륙비전(ACM)을 세우게 하셨고 많은 동역자를 보내주셨다.

우리 부부는 88년 스와질란드로 옮겼다. 이후 영국인선교사 폴 버클랜드 목사 부부, 그 후 99년 8월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현광섭, 이연희 선교사 부부가 파송돼 ACM 소속으로 말라위 사역을 이어갔다. 현 선교사 부부는 현재까지 교회 개척과 고아들을 위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해 150여명의 현지인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전파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아마 말라위의 귀한 경험이 없었다면 이후 스와질란드와 모잠비크 남아공 콩고 잠비아 케냐에서의 사역도 없었을 것이다. 나를 연단시키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스와질란드 김종양 선교사

◇김종양 선교사 △1946년 전북 출생 △1985년 독일 베뢰아 신학교와 영국 웨일스 신학대학 졸업 △1985년 10월 병원선교회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세계선교회에서 파송받아 말라위 사역 시작 △1986년에 아프리카대륙선교회를 설립해 말라위 스와질란드 등 중남부 아프리카 7개국에 교회 고아원 병원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신학교 선교농장 기도원 기독의과대학 설립 △1987년 미국 남침례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 받고 1988년 6월 선교지를 스와질란드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