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5) 양화진 선교기념관 건축비, 재벌 총수들 “우리가”

입력 2014-02-10 01:32


100주년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순교자기념관을 짓기 위해 법인체가 돼야 했다. 1984년 11월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순교자기념관 건립을 위해 영락교회 정이숙 권사가 경기도 용인 임야 33만여㎡를 기증했다. 양화진 묘지 증여도 이뤄졌다. 양화진 선교기념관 건립은 국내 기업인들의 협찬으로 이뤄졌다. 한경직 목사가 재벌 총수를 초청한 오찬 회동에서 기독교에서 한국의 독립과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을 직접 소개했다. 이어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 묘지에 잡초가 무성하고 쓰레기더미가 가득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비쳤다. 한 목사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말했다. “목사님, 설명 알아들었습니다. 공사비가 얼마입니까?” 내가 “약 7억원입니다”라고 했다. 정 회장은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손가락 2개를 들어보였다.

1분도 되기 전에 비서가 봉투를 들고 왔다. 2억원이었다. 한 목사는 “고맙수다래”라면서 정 회장의 손을 잡았다. 지켜보고 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나도 2억원 하겠습니다”고 했다. 이어 박용학 최대섭 김인득 정태성 장치혁 회장, 최장근 장로가 참여했다. 7억원이 그 자리에서 해결됐다. 86년 선교기념관이 준공됐다.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이 급격히 식었다.

1884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숨진 순교자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2600여명. 이들 순교자를 위해 교회와 사람들을 찾아 모금을 시작했다. 모두 세 차례 전국 1만2000여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당시 내가 쓴 편지들을 보면 지금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다. 87년 우여곡절 끝에 기념관 진입로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다.

도로 입구에서 대형 암반이 발견됐다. 폭파하려 했으나 인근 군부대의 반대에 부닥쳤다. 건축 허가를 받으려면 진입로 마련이 필수였다. 머리를 싸매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당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 정서가 좋지 않았다. 한 목사가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게 바람한지도 고민되고, 부탁해서 안 될 때 뒷수습도 걱정됐다. 일단 시도했다.

연세대 교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규호 박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를 통해 약속을 잡았다. 한경직 목사는 청와대 앞 광화문에서 면담자와 방문 목적을 말했다. 한 목사는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 접견실에 도착했다. 전 대통령이 폭포수같이 열변을 토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물었다. “아, 그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순교자기념관 건립 의미를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황영시 장군에게 얘기하세요. 아니 내가 전화하지요. 목사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당장 해드려야지요.” 그날 이후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9년 11월 순교자기념관이 완공됐다. 전 대통령은 몇 년 뒤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은둔할 때 나는 그곳을 찾았다. 그는 고마워했다. 비록 그로 인해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그를 생각하면 인간적 연민이 있다.

나는 늘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중 한 곳이 정신지체아 특수시설 다니엘학교다. 55년 미국인 윌리 맥다니엘이 설립한 보육원이 전신이다. 92년 학교 운영 법인인 구령회 이사장이 된 나는 다니엘학교 부지 이전 임무를 맡았다. 새 부지 10여곳 모두 주민들이 반대했다. 혐오시설이라는 게 이유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