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우선덕] 누구나 똑같지는 않아서

입력 2014-02-10 01:35


친한 지인의 자제 결혼식에 불참한 적이 있다. 도무지 유쾌하지 않아서였다. 마침 결혼식이 겹쳐서 두 곳 다 부조만 보냈다. 부조가 아까웠지만 나약한 이 인간은 후환이 무서워 그냥 그리하고 말았다.

친한 지인은 소위 사회지도층 명사이다. 평소 소탈한 분이기에 영화 속같이 아름다운 결혼식이겠지 짐작하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결혼식이란 그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하는 몇 십명 정도만 오롯이 참석하는 소박한 결혼식을 뜻한다. 그런데 청첩장을 보니 장소부터 억억 소리 나오는 특급호텔 무슨 거대한 방이다. 일반적인 부조 액수로는 제가 먹는 밥값의 반도 댈 수 없는, 소박하려야 소박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긴 남의 집 혼사다. 자기네 돈 자기네가 쓰는데 아름다운 결혼식 운운하며 기대한 자가 별꼴이다. 자칫 있는 자를 향한 없는 자의 구질구질한 질시와 넋두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날 겹쳤던 결혼식은 당시는 겨우 일면식한 사람. 공적인 행사에서 잠깐 이름만 주고받았으니 그 집 자제는커녕 청첩한 혼주와도 모르는 사이였다. 칠팔 년 전 어느 토요일이 이렇듯 언짢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한 좁은 소견으로는 두 집 결혼식 일을 서로 다른 이유로 여전히 동의하게 되질 않는다.

가끔 호화 결혼식 기사가 떠서 밴댕이 속을 긁는다. “결혼식은 죽어도 1억짜리 호텔에서…신부의 로망, 결혼을 앞둔 신부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철부지 같은 저런 식의 기사 댓글엔 나무라는 의견이 더 많다. 없는 자가 많다는 증거인지, 건전한 자가 많다는 증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이 계제에 지적하고 싶은 일반화의 오류가 한 가지 있다. 호화 결혼식에 한해서가 아니고 흔히 무심코들 쓰는 ‘남자라면 누구나, 여자라면 누구나, 주부라면 누구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학생이라면 누구나’ 식의 ‘누구나’는 부디 꼭 쓸 곳에만 쓰면 좋겠다.

호화 결혼식 기사 내용과는 달리 그 댓글들을 봐도 호화 결혼식이 결혼을 앞둔 신부 ‘누구나’의 로망은 아니지 않더냐. 축의금 대신 쌀을 받아 불우이웃에게 보냈다, 축의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방콕 간 게 아닌 방콕하는 걸로 신혼여행 삼았다, 부모형제 친지 앞에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둥근 반지 나눠 끼는 걸로 결혼식을 끝냈다, 결혼식뿐 아니라 하루하루 모두가 평생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다 등의 발언이 증명하듯 세상 어떤 일에든 ‘누구나’ 똑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우선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