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자회사 직원 2800억 사기대출 파장… 뻥 뚫린 여신심사 서류만 보고 “대출”

입력 2014-02-07 02:32


KT 자회사 직원이 주도한 이번 대출 사기사건은 구매업체와 납품업체 직원들의 철저한 공모에 각종 피해예방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과 은행들이 수년간 속수무책으로 당했음을 보여줬다. 특히 10곳의 은행들이 몇 년이 지나도록 사기 수법을 전혀 거르지 못한 채 3000억원 가까운 돈을 대출해줌에 따라 은행 여신심사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이번에 금융사들은 고객정보 유출에 이어 금융 사기까지 당했다는 점에서 내부통제에 총체적 허점을 드러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구매업체와 납품업체 직원 간 짬짜미 사기=이번 사기는 외상매출채권(미수금)의 근거가 되는 세금계산서를 가짜로 만든 뒤 이를 은행들에 제시해 대출을 받아 가로챈 수법으로 이뤄졌다.

KT ENS는 중소기업 N사 등으로부터 삼성전자 휴대전화를 납품받았다. 이들 납품업체는 현금 대신 KT ENS에서 세금계산서를 받았다. 이때 사기범들은 있지도 않은 매출채권을 이용해 세금계산서를 만들었다.

세금계산서를 받은 은행들은 형식적인 검사 후에 대출금을 내줬다. 2800억원 상당의 대출금은 자산 유동성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든 특수목적법인(SPC)을 거친다.

납품업체는 SPC를 통해 납품대금을 받아가고, 나중에 KT ENS가 대출금을 갚는 구조다. 이들은 사기가 발각당하지 않도록 정상적인 매출채권을 통한 대출도 일부 받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은행의 허술한 대출심사…책임 논란에 따른 법적 다툼 소지도=피해금액이 약 1600억원으로 가장 많은 하나은행 관계자는 6일 “은행은 서류를 보고 절차상 문제가 없으면 대출을 해준다”며 “현장에 가서 직접 거래가 있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KT ENS의 인감까지 있어 믿고 대출해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른 시중은행 기업영업 지점장도 “납품 물건이 삼성전자 휴대전화, 지급인이 KT 자회사 등 신용이 확실한 대기업이 대상이라면 대출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국은 시각이 다르다. 은행들이 기본만 갖췄더라도 이렇게 많은 액수를 대출해주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박세춘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은행의 대출 심사는 서류만이 아닌 기업체를 통한 내용 확인이 기본”이라며 “대출 절차만 제대로 지켰더라도 서류나 인감이 가짜인지 여부는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출서류의 진위 확인을 소홀히 했다는 것. 박 부원장보는 “해당 은행에 대한 검사 후에 여신 심사를 소홀히 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사기 액수 등을 고려해 엄한 징계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기 대출에 대한 책임을 놓고 벌써부터 KT ENS 측과 은행·저축은행, 지급보증을 선 증권사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모양새다.

은행 측은 이번 사기에 직원이 관련됐고 서류에 인감까지 찍힌 만큼 KT ENS가 대출금을 상환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KT ENS가 날인을 한 채권양도 승낙서가 있기 때문에 대금을 지급해 달라고 KT ENS 측에 통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KT ENS는 이번 사건은 자사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KT ENS는 이날 입장 발표를 통해 “회사는 금융사에서 주장하는 매출채권을 발생시킨 적이 없으며 지급보증한 사실도 없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은행이 대출 사기를 당한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에 대해 지급보증한 한국투자증권과 신한금융투자는 “지급보증을 서야 하는 담보 자체가 가짜인 상황에서는 보증 의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모처럼 제 역할 한 금감원 예방 시스템=이번 사기 사건은 금감원의 ‘저축은행 여신 상시감시 시스템’에 의해 덜미를 잡혔다. 금감원은 2주일 전쯤 한 저축은행이 취급한 대출이 같은 차주에 대해 대출 한도초과 혐의가 있는 사실을 발견해 서면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도중 서류 일부가 위조된 것으로 판명됐고 자금추적 결과 사기범들의 대출금 돌려막기 행태를 확인한 것이다.

여신 상시감시 시스템은 지난해 저축은행의 대주주 신용공여 등 불법행위에 사전 대응하기 위해 구축됐으며 결국 1년 만에 대형 대출 사기를 적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고세욱 임세정 기자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