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간 대리 작곡가가 쓴 곡 내 것처럼 사용”… ‘현대판 베토벤’ 日 청각장애 작곡가 고백

입력 2014-02-06 02:34

현대판 베토벤으로 불린 일본 청각장애인 작곡가가 수십년간 대리 작곡가를 써 왔다고 스스로 밝혔다. 일본 남자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소치올림픽에서 사용하려던 음악도 이렇게 대작(代作)한 곡으로 드러났다.

히로시마 출신의 피폭 2세 작곡가 사무라고치 마모루(50)는 5일 새벽 변호사를 통해 대작 사실을 자백하는 내용의 팩스를 각 언론사에 보냈다고 마이니치신문 등이 보도했다.

사무라고치는 35세 때인 1999년 청력을 완전히 잃은 뒤에도 ‘교향곡 제1번 히로시마’ 등을 작곡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미국 언론에는 현대의 베토벤으로까지 소개됐다. 17세 때 편두통 등으로 청각 장애를 얻은 그는 자서전에서 음대에 진학하지 못해 독학으로 작곡법을 익혔다고 했었다. 청력 상실 이후엔 절대 음감과 손으로 느끼는 진동에 의존해 작곡했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그는 이번 문서에서 자신이 혼자 쓴 것으로 알려진 곡들이 사실은 수십년 전부터 다른 사람이 대신 작곡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자신이 악곡 구성과 이미지를 제공하면 다른 작곡가가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창작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대표작 히로시마도 남이 쓴 곡이었다. 이 곡은 2008년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주요 8개국(G8) 하원의장 회의 기념콘서트에서 초연된 뒤 클래식 음악으로는 드물게 음반이 10만장 넘게 판매됐다.

일본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 다카하시 다이스케가 소치올림픽에서 사용하려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도 대리 작곡가가 만든 곡으로 드러났다. 오는 11일로 예정돼 있던 이 곡의 악보 발매는 중단됐다.

사무라고치는 대리 작곡가가 앞에 나서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자신을 단독 작곡자로 표기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팬들을 배신하고 (음악) 관계자를 실망시킨 내용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며 “깊이 반성한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은 사무라고치와 대리 작곡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일본 음악계는 사무라고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NHK는 그동안 뉴스와 특별 방송 등으로 사무라고치를 크게 부각해온 데 대해 시청자에게 사과했다. 이 방송은 사무라고치의 대작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라고치는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려고 쓴 레퀴엠을 토대로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작곡하고 한국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초연자로 선택한 바 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