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 새로운 100년의 약속] (5) 2·8 독립선언과 YMCA
입력 2014-02-06 02:35
독립운동 본산서 韓·日 문화교류의 중심으로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일본이 만일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오족은 일본에 대하야 영원의 혈전을 선하리라….’(조선청년독립단, 1919년 2·8 독립선언서 중)
나라 잃은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부르짖었다. 이 외침은 재일본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3·1운동의 모체가 됐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이바지하며 국내외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1906년 창립한 재일본동경조선YMCA(현 재일본한국YMCA)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해방의 꿈을 키우고 대한인으로서의 민족적 자존감을 형성해오던 중심축이었다. 매년 2월 8일이면 많은 국내외 인사들이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문화관에 모인다. 올해도 이곳에서 ‘2·8독립선언 제95주년기념식’이 어김없이 열릴 예정이다.
이 모임은 한국 청년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2·8독립선언으로 체포당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던 ‘일본인’ 변호사와 지식인들을 함께 추모하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의 역사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 한·일 양국 사이에 참된 공생의 흐름이 있었다는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학생 신분으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같은 일본 변호사들은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한국 유학생들을 위해 전심을 다해 변호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내란죄를 적용하려고 했던 검사의 논고는 인정받지 못했고 출판법 위반이라는 가벼운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일본인 지식인들은 체포된 유학생들을 위한 YMCA(당시 백남훈 총무)의 모금운동에도 흔쾌히 동참했다.
3·1독립운동 이후, YMCA를 ‘독립운동의 책원지’로 간주한 일본 정부는 1919년 말 YMCA 건물을 일본조합교회의 관리 하에 두고자 했다. 하지만 유학생들의 큰 저항에 이어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의 비판으로 무산됐다.
이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절친한 친구였던 김정식 초대 YMCA 총무, 요시노 사쿠조가 ‘벗’이라고 칭한 백남훈 총무 등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훌륭한 교류가 쌓아온 열매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간의 긴장 속에서도 평화를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과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재일 한국인의 역사와 함께 걸어 온 재일본한국YMCA는 2009년 2·8독립선언 90주년 기념으로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을 개설하고 역사 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2·8독립선언’을 제작, 교육 현장에 제공해 왔다. 또한 한국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문화 활동, 일본어학교, 한·일 문화교류, 숙박연수사업 등도 이어 왔다. 아울러 재일 한국인을 비롯해 매년 증가하고 있는 재일 외국인,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하는 국제·지역사회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화해와 공생’을 위한 재일본한국YMCA의 노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김수남 총무<재일본한국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