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경래 (13) 한경직 목사 “나와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입력 2014-02-06 02:34


1980년 7월 김장환 목사로부터 서울 하얏트호텔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조용기 김장환 목사, 유상근 명지대 이사장이 있었다. 그리고 생면부지 외국인 3명이 있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보좌관을 했던 찰스 콜슨 부부와 비서였다. 콜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크리스천이 된 그는 76년 ‘백악관에서 감옥까지’란 책을 냈던 이였다.

나는 엉겁결에 세 사람의 관광 안내인이 됐다.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 서울 경복궁을 함께 다녔다. 김포공항에서 헤어질 무렵 그가 사업 제안서를 건넸다. 미 콘덱그룹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단열재 ‘아이소핑크’에 관련된 서류였다. “내 친구가 한국 사업 파트너를 찾아요. 아는 사업가를 소개해주든지, 당신이 해보든지 알아서 하세요.” 나는 친구들을 모았다.

82년 2월 경기도 화성에 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의 외식사업체인 던킨도너츠 사업에도 참여하게 됐다. 11월 어느 날 한경직 목사가 말죽거리 인근에 살던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한 목사는 예장통합 목회자였다. 예장통합은 한국교회협의회(NCCK) 소속으로 진보적 교단이었다. 반면 나는 광복 직후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된 고신 교단의 보수적 평신도였다.

나는 한 목사와 함께 생활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저와 함께 일합시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려는데 함께해주시지요.” 고민했다. 성공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사업을 막 시작한 때였다.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만하면 세상 일 놓을 때 된 것 아니십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옆에 있던 아내가 거들었다. “여보,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세요.”

생각지 못한 일이 관련돼 있었던 것을 후일 알게 됐다. 2006년 한 목사 소천 6주기 행사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한 무리 여인들이 찾아왔다. 북한 사투리를 썼다. “장로님, 어떻게 한 목사님이 장로님을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뽑았는지 아십네까? 저희가 추천한 거야요. 그때 저희가 감동받아서.” 내가 과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을 무렵 흥천교회에 빚을 받으러 왔던 이들이었다.

82년 11월 아이소핑크 대한아이소플라스트사 생산공장 준공식을 마치고 다음달부터 100주년협의회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는 그때 한 1년만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길어도 3년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준비기간 내내 나는 거의 쉬지 못했다. 광장을 사용하기 위해 정부와 시를 설득하고 기금 확보를 위해 독지가와 교회를 찾아다녔다.

가장 마음을 많이 쓴 것은 불의의 사고가 생기지 않고 교회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첫날 본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서울 여의도 하늘에 오색 무지개가 나타났다. 수만명이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84년 8월 15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대회에는 연인원 400만명이 참여했다. 김준곤 이호문 이만신 피종진 강원용 조용기 오관석 목사 등이 설교했다.

큰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여의도에는 쓰레기 한 조각 남지 않았다. 여의도를 관할하는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이 추가로 하는 일이 없었다. 성도들이 모두 치웠기 때문이다. 100주년협의회는 선교기념관과 순교자기념관을 짓기로 했다. 한 목사는 “우리는 한국에 온 선교사와 순교자의 피, 땀, 눈물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